[여순사건특별법 기획] 여순사건, 그때를 되돌아본다(12)
[여순사건특별법 기획] 여순사건, 그때를 되돌아본다(12)
  • 김충석
  • 승인 2020.08.11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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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선3기, 5기 여수시장

  13, 여수시 삼산면과 초도에도 수난이 불어 닥쳐

1930년대부터 여수에서 나로도~손죽도~초도의성항~거문도~제주항을 격일제로 운항하던 여객선이 있었는데, 19481020일부터 여객선이 끊어졌다. 의성리 이주환 씨의 웃상점에 라디오가 있어서 여수에서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온동리에 쫙 퍼져나가서 객선이 못 온줄 알았다.

광주 4연대에 있던 대동리 출신 백정인 중사의 소개로, 5월에 김갑천, 박구환 박기웅 세 청년이 14연대에 지원하여 갔으나, 10월 중순 의성리 새몰 출신 김갑천(1931~ )은 정신분열증세로 제대시켜 귀가조치(歸家措置) 하였다.

김상신(1917~1977) 씨는 도쿄에서 메이지대학 재학 중에 학병으로 끌려가서 평택에서 비행장공사를 하다가 해방이 되어 귀향한 후에, 여수고등여학교에서 영어 선생을 하고 있었다. 10월 초에 이상한 꿈을 꾼 뒤에 학교를 그만두고, 다음 날 아침 여수항 여객선부두에서 보고도 말도 안 하고 히죽히죽 웃기만 하는 김갑천을 만났는데, “초도에 데려다주러 간다는 군인에게 집안 동생이다, 내가 데리고 가겠으니 집에 갔다 내일 오후에 귀대하소하고 같이 초도 의성리로 들어왔다.

다음날부터 동네 청년들을 데리고, 면사로 짠 그물에 갈을 하여 그물의 수명을 늘리는 큰가마솥에, 낮에는 바닷물을 길어다 붓고 장작불로 끓여서 소금을 만들고, 밤이면 땜마에 남포불을 켜서 뱃전에 비추고 천천히 노를 저어가면 불을 보고 달려드는 멸치를 잡아서 소금을 넣고 솥에서 삶아 말리고 있었는데, 며칠 후에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켜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네하는 소문이 초도에까지 퍼지자, 김갑천 씨의 병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깨끗이 완치되었고 6.25 참전용사로 생존해 계신다. 동네 어른들이 두 사람은 선산이 돌봤다.”고 하였다. 박구환 씨의 아버지 박홍삼 씨는 의성리 구장을 하고 있었는데, 가족들은 물론 온 동네 사람들이 걱정하며 안절부절못하였다.

여수에 유학을 보낸 가정에서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고 애를 태웠다.

그러던 어느 날 밤중에 여러 사람들이 진막리 쪽에서 등불을 앞세우고 의성리로 넘어 들어오면서 총소리가 요란하더니, “구장, 나와!, 구장, 나와!” 큰소리로 외쳐, 동네 사람들이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아침 일찍 구장 밑에서 마을 일을 돕고, 동네 대소사에는 정해진 곳마다 돌며 욋소리를 하는 박두회 씨가 동네 사람 다 들어 보시오~~ 오늘은 혁명군들이 들어와서 인민재판을 한다고 합니다. 지금 바로 어른들은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 동각마당으로 나오랍니다. 안 나온 사람은 죽인다고 하니 모두 나오십시오.” 평소와 달리, 떨리는 목소리로 세 번 외치고 가는데, 여수에 반란이 일어나서 마구 죽인다는 소문에 긴장하고 있었고, 간밤에 총소리가 나고 시끄러워 잠도 설친 어른들은 인민재판 한다는 소리에 더 놀라 두려워 떨며 동각마당에 모여들었다.

김상신 씨는 그날따라 멸치가 많이 잡혀 여러 집에서 거적(꺼적)을 빌려와서 멸치를 삶아서 자갈밭에 너느라, 날이 새서야 집에 들어와 막 잠이 들었는데, 급히 깨우는 바람에 나갔더니 박상춘 씨 집 앞 삼거리에 서 있던 반란군이 이 새끼 왜 인자 나와하면서 목검을 내려치자,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려 막아버리자, “이 새끼가하면서 궁둥이를 갈겼으나, 이번에는 막지 않고 맞았는데 빨리 가 개새끼야하고 악을 썼다.

동각마당 한쪽에 김상신 씨 등 다섯 사람의 손을 뒤로 묶어 세워놓고,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 위대한 김일성 장군님이 영도하는 용맹한 인민군대가 이승만 괴뢰정권을 타도하고, 우리 남조선인민을 해방 시키기 위해 38선을 밀고 내려오고, 여수신월리에 주둔한 14연대 혁명군들이 19일 저녁에 봉기하여, 여수경찰서를 점령하여 경찰서장을 비롯해서 검둥개 새끼들과 우익 놈들을 다 쳐 죽이고, 순천도 점령하고 북으로 쳐 올라가고 있어, 며칠 후면 인민군대와 서로 만날 것이다. 남조선도 위대한 김일성 장군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세상이 되면, 소작도 없어지고 노동자와 농민의 세상이 되어, 빈부귀천 없이 누구나 똑같이 행복하게 잘 사는 나라가 될 것이다. 여러분도 위대한 김일성 장군을 맞이할 채비를 하라고 하면서 연설을 마치고, 스스로 박수를 치자, 동네 사람들과 학생들도 따라서 박수를 쳤다.

다른 한 사람이 나와서 이 다섯 사람은 5·10 선거에 앞장서서 인민재판으로 죽이려 했으나, 잘못을 뉘우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위해 충성을 맹세했고, 구장 박홍삼씨 아들이 14연대 혁명군이라 하니, 우리의 동지요, 동무들을 봐서 목숨은 살려주겠소.” 하는 소리에 벌벌 떨고 있던 동네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반란군의 선창에 따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 위대한 김일성 장군 만세! 14연대 혁명군 만세! 삼창을 하고 어른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학생들은 동각 청안으로 들어가라하여, 청안으로 들어가 앉으니 칠판에 처음 보는 기를 그려놓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기라면서,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국으로 시작되는 김일성 장군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 그들은 14연대 군인이 아니고, 고흥 쪽에서 배를 타고 들어온 남로당원들이었다. 김승복 씨는 동네 사람들을 살려주었다고 송아지를 잡아주고 남은 쇠고기를 소금에 절여주고, 자기들이 거문도로 가겠다고 하여 방정대 씨의 상고선에 태워 거문도에 내려주고 배만 돌아왔다.

다음 날 오후에, 대동리 출신 이봉희 대위가 정장을, 정갑주(갑원) 중위가 기관장으로 있던 해군 두만강호가 전에도 가끔 기항(寄港)을 했었는데, 초도 의성항으로 들어와서 정박(碇泊)하였다. 여기저기 총알 자국에 분필로 동그라미를 그려놨는데, 여수신항을 출발하여 장군도를 돌아 나오다가 반란군들이 쏜 총알에 맞은 자국이라면서 해군들은 다치지 않았다고 하였다.

해군 소위가 동각에 들려 인민공화국기와 김일성 장군 노래가 써진 칠판을 보고 권총으로 쐈다. 어른들과 방정대 씨 뱃사공의 말을 들어보고, 바로 거문도로 가서 반도들을 붙잡아갔다. 김상신 씨는 반란이 진압된 뒤에 여학교 교장 선생과 선생들이 희생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급히 배를 타고 장흥으로 해서 서울로 올라가서 1949년 육사 9기로 입교하였다.

며칠 후 두만강호가 거문도에서 초도로, 손죽도로 반란군에 의해 급하게 만들어진 남로당원 명부에 이름이 적혀 있던 삼산면 사람들을 여수로 싣고 나갔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종산국민학교(중앙교)에서 심사를 받고 있었는데, 김종원 대위의 닛본도(日本刀)에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고, 학교 뒷밭에서 즉결처분을 받은 사람, 다른 곳으로 끌려가서 죽은 사람, 운 좋게 재판에 넘겨진 사람도 있다. 부산 5연대 김종원 대위는 백두산 호랑이로 불렸고, 시내에 반란군이 없자, 섬으로 도망간 줄 잘못 알고 가 봐도 없자, 돌산에서 지방민 3명을 죽이고 남면 안도로 건너갔다.

반란이 일어나자 치안을 맡고 있던 안도지서 경찰들이 모조리 도망쳐버려, 섬의 공안질서가 공백이 되었을 때, 김부용 등 똑똑한 동네 청년들이 자위대를 조직하여 치안을 유지해 왔는데, 동네 사람들을 안도국민학교에 모이라 하고, “이 중에 자위대는 나오라고 하여, 젊은이들은 그동안의 노고에 대한 칭찬이라도 할 줄 알고 20여 명이 당당하게 나가서 줄을 섰더니, 김종원 대위가 상을 주는 대신 운동장 끝은 바다인데, 줄줄이 세워놓고 모조리 쏴 죽였다는 등등 흉흉한 소문으로 뒤숭숭하더니, 몇 사람만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오자, 초도섬마을이 초상집으로 변해버렸다.

삼산면 사람으로 여순사건으로 희생된 거문도 사람들이 96, 손죽도 8, 소거문도 3명이고, 초도는 9명인데 대동리 박동호, 허창기, 강상규, 배기옥, 김한두 씨가 여수에서 희생되거나, 징역을 살다가 6·25사변 때 희생되었다.

강수남 씨는 다행히 진주형무소에 수감되어 만기 출소하였다.

의성리 박선동 씨는 초도어업조합 옆집에 살았는데 의성리 인민위원장으로 여수에서 희생되고, 김승태 씨는 부위원장으로 모진 고문에 왼쪽 어깨뼈가 부러졌지만, 시종일관 동네 사람 5명이 5·10선거에 앞장섰다고 인민재판으로 죽인다는데, 내 동생도 묶여있어 살리려고 시킨 대로 이름만 써 주었을 뿐, 그들이 떠난 뒤에 아무것도 안 했다.” 고 끝까지 사실대로 주장하여 구사일생으로 살아왔다.

14연대 박구환 씨는 벌교에서 삐라를 보고 자수하여 재판을 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 되었다. 19501월에 형 박재환 씨가 김상신 육군소위의 도움으로 면회를 하고 와서, 석방될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6·25사변이 나서 사흘 만에 서울을 뺏기면서 서대문형무소와 마포형무소의 재소자들이 인민군에 의해 문이 열려, 무섭게 설쳐 대는 것을 뒤늦게 알고, 대전에서 후퇴하던 군인들이 다시 돌아와서 모든 재소자와 함께 형기와 상관없이 처형되는 불운을 당하였. 남로당 명부에 있거나 살아 돌아온 분들을 보도연맹원이라 불렀다. 가끔 거문도에 있는 삼산지서로 데리고 가서 교육을 받고 오곤 하였다. 6·25사변이 나서 여수와 나로도까지 점령되고 낙동강 전투가 한창이던 19508월 말경, 거문도 조합배가 와서 초도에서 20여 명을 거문도지서로 싣고 갔다.

진막리 박수봉(박갑안) 씨는 인품이 훌륭하고 덕망이 높은 분인데, 나로도에서 피신해온 고종사촌을 숨겨주었다 하여, 거문도 출신 의용경찰 김덕운에게 모진 매를 맞고 91(음력 729) 돌아가시자, 거문도어업조합 지도선이 밤에 의성리로 싣고 들어왔고, 땜마로 옮겨 선창 안으로 들어오는데, 같이 갔던 사람들이 통곡했고, 비보를 듣고 달려온 유족들과 함께 온 동네가 울음바다가 되고 원통 해하였다.

대동리 김상곤 씨의 증언에 의하면 진막리 박기웅 씨는 14연대에 갔다가 죽었고, 강동기 씨는 이봉희 정장이 살려주어 이장도 하고 삼산면 의회 의장도 하였다. 그때 여수수산중학생들이 많이 가담했었는데, 진막리 박강호(초도교 9) 씨는 2학년인데 수산중학생이라고 오동도에 잡혀가서 죽는 구나 생각하고 있을 때, 이봉희 대위가 찾아와서 삼산면 학생들을 데리고 나오라해서 살았다고 하였다. 거문도 임길동 씨는 14연대 군인이었지만 살아서 경찰도 하고 1998년에는 여천군의회 의원을 하고 있었는데, 여수지역사회연구소에 증언하기를 그때 두만강호를 타고 갔던 사람들이나 그 가족들이 이봉희 때문에 죽었다고 표현을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을 안 합니다. 14연대 군인이었던 우리도 살렸는데, 일부러 고향 사람들을 죽이려고, 다른 사람들을 잡으러 갔겠습니까?” 하였다.

6·25사변이 나자 여객선을 해군에서 징발하여 거문도 학생들은 어업조합 지도선을 이용했고, 초도는 대동리 배상수 씨의 상고선을 이용했는데, 1954년 여름방학이 끝날 때 거문도어업조합 지도선이 손죽도를 거쳐 초도유학생들도 싣고 거문도로 가서, 거문도 유학생들을 싣고 역만도 밖으로 항해하며 여수로 가고 있었는데, 필자는 여수서중학교 2학년이었다.

원정상 면장도 타고, 삼산면민들로부터 동창생들까지 죽였다고 많은 원성을 들어온 이봉희 전 두만강호 정장도 동승 하였다. 두 분은 오랜 시간 대화를 하셨다. 이봉희 씨가 상부에서 남로당 명부에 올라있는 섬사람들을 전부 싣고 나오라 하여 명령을 따랐을 뿐인데, 육군에서 그렇게 참혹하게 사람들을 처단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면서, 그럴 줄 알았더라면 모두 도망가고 없었다 할 걸, 평생 한()이 되고 후회스럽다.”라고 하였다.

소해정 JMS-305 두만강호 1950.6.29. 새벽 38선 인접 동해안에서 작전 임무를 마치고 묵호항으로 복귀 중, 미 해군주노함(CLAA-19)의 오인 사격으로 오후 4시경 침몰·전 여수함장 김성훈 예비역 중령 제공
소해정 JMS-305 두만강호. 1950.6.29. 새벽 38선 인접 동해안에서 작전 임무를 마치고 묵호항으로 복귀 중, 미 해군주노함(CLAA-19)의 오인 사격으로 오후 4시경 침몰·전 여수함장 김성훈 예비역 중령 제공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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