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특별법 기획] 여순사건, 그때를 되돌아본다(11)
[여순사건특별법 기획] 여순사건, 그때를 되돌아본다(11)
  • 김충석
  • 승인 2020.08.05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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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선3기, 5기 여수시장

      12, 협력자 색출과정에 민간인들 학살과 시내 중심가에 방화(放火)!

 26일 저녁 8시경 잡혀있던 할머니 한 분이 저기 장 기(1952~53년 여수시장)씨 집에 불이 났다고 울먹여, 그쪽을 보니 하늬바람을 타고 영단(전신전화국 자리) 앞쪽이 불바다로 변해갔다. 자기 집이 타도 불을 끄러 갈 수 없었다.

오동환 소방서장이 불을 끄겠다고 했으나, 군인들이 제지하고 김종원 대위가 구타하는 것을 봤다는 목격자도 있다. 27일 저녁 8시경에는 충무동 시민극장 근처에서 갑자기 불길이 치솟더니 때마침 불어 닥친 하늬바람을 타고 무섭게 번져나가 해안통에 쌓아둔 드럼통에 불이 붙어 하늘 높이 치솟아 터졌고 28일 오후까지 불에 탔다. 소방서에서 초기에 진압했거나, 그때 운동장을 가득 메운 주민들보고 불 끄라고 명령만 내렸더라도 여수 중심가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1028일 오후 3시경 시민들은 풀려났다. 그러나 대부분의 집은 불타버리고, 그때부터 가담자의 색출과 처벌이라는 무서운 토벌작전이 다시 시작되었다. 수도경찰(朱鍾日경감)과 전남도경 특수대, 여수경찰 특수대가 종산국민학교(중앙초교)에 본부를 두고, 40대 미만의 남자들은 가담혐의가 있는 것으로 보고 운동장에 팬티만 입은 알몸으로 앉혀놓고, 근 달포 동안 한 사람씩 조사실로 불러 장작개비를 휘두르며 자백을 강요하였다.

견디다 못한 피의자들이 비명을 지르다 까무러치면 물동이로 찬물을 끼얹어, 정신을 차리면 또 고문을 해서 억지로라도 자백을 받아냈고, 일부는 경찰에 의해 오동도로 끌려가 사라졌다. 우익인사라고 해도 모두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충무동 1297번지에서 여수고무공장을 경영하던 정태식 사장은 문수동 야산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서 가족들은 지하에 숨어있고, 간부들과 마루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진압군이 들어닥치면서 불문곡직하고 총을 쏘아 7명을 죽여 버렸다. 반란군이 여수를 일주일 동안이나 점령하고 있던 상황을 고려한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지라도 주민과 학생에 대한 조사는, 보다 신중하고 면밀해야만 했었다.

반란에 협조했다는 혐의를 씌우는 것은 쉬웠으나, 혐의자로 몰린 사람이 그렇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웠다.

진압군과 경찰의 과도한 색출 앞에서 전 시민은 정도에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가 생명의 위험을 느끼며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진압군의 협력자 색출과정은 12월 중순까지 한 달 반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이로 인해 여수 시내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공포 분위기에 휩싸였다.

14연대가 여수를 장악했던 때에는 인민위원회가 이른바 반동분자로 간주된 경찰관, 우익인사, 우익 청년단체원들을 지목하여 처형했다. 이에 따라 처벌대상에서 벗어나 있는 일반 시민들은 큰 우려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진압군은 전 시민을 혐의자로 의심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처벌받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으로 벌벌 떨어야 했다. 여수의 중심 시가지 일대는 불에 타서 재만 남았고, 며칠 사이에 여수 천지는 공포와 죽음의 그림자가 너울대는 도시로 변해버렸다. 저들의 총칼 앞에 마지못해 가담한 수많은 사람들까지 흑백을 가르는 재판도 받지 못하고 순식간에 너무도 억울하게 즉결처분으로 죽어갔지만, 운 좋게 현장에서 사살되지 않은 피의자들은 재판을 받고 사형을 받은 사람도 많지만, 징역을 언도 받은 사람도 많고, 더 많은 사람들이 무죄 석방되기도 하였다.

그해 1113일부터 17일까지 이틀 동안 순천고등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그때 언도 받은 내용이 그들의 죄상이 어떠했는가를 백일하에 폭로해주고 있다.

· 재판에 회부 된 인원 : 458,

· 양민으로 판명돼 석방된 자 : 190, 사 형 : 102,

20년 징역 : 75, 5년 징역 : 79, 무죄석방 : 12명이었다.

* 육군사령부는 1949110, 여순사건과 관련하여 군사재판에 회부된 군인의 재판 결과를 발표하였다. 2,817명이 재판을 받아 사형 410, 종신형 568, 나머지는 유죄형, 혹은 무죄 석방되었다.

한국전쟁사 1에는 여순사건 1주일 현재 여수지구에서만 관민 1,200명이 학살당하고, ·경상자 1,150, 가옥 소실, 파괴 1,538, 이재민 9,800여 명의 피해를 냈으며, 순천지구의 인명피해도 400여 명에 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전쟁에 있어서의 노동당 전략’(김점곤 저)에 의하면 여순사건의 피해를

* 여수지구 피해 : 반군에게 학살된 관민 1,200여 명, 중상을 입은 관민 1,150, 소실, 파괴된 가옥 1,548, 이재민 9,800여 명,

* 순천지구 피해 : 사자(死者) 1,134, 행방불명 818, 전파가옥 13

 

국군이 올린 전과(戰果)

전과(戰果) : 유기시체 392, 포로 1,512, 노획품: M2 소총 952, 38식 소총 679, 99식 소총 863, 박격포 14,

손해(損害) : 전사 장교 9, 사병 42, 부상 118,

합동년감(合同年鑑)에 소재된 사건 관련자에 대한 처벌상황은

111일 사건 관련자 89명 사형집행

7일 광주 군사재판에서 반도 28명에 사형 언도

3~14일 순천 군사재판에서 반도 102명에 사형 언도

6일 고등군사재판에서 반군 35명에 사형 언도

여순사건 피해 상항은 기록마다 다르다는 것을 참작하기 바랍니다.

해방공간(解放空間)에서 좌익(左翼)이 뭔지, 우익(右翼)이 뭔지도 모르면서 우왕좌왕하다가 정부수립 2개월 만에 터진 민족적 비극이다.

좌) 사건 당시 여수서국민학교의 옛 건물 / 우) 해방 전에는 여수수산중학교이며, 사건 당시는 여수종산국민학교였던 여수중앙초등학교의 옛 모습
좌) 사건 당시 여수서국민학교의 옛 건물 / 우) 해방 전에는 여수수산중학교이며, 사건 당시는 여수종산국민학교였던 여수중앙초등학교의 옛 모습

<계속~>

[여수인터넷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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