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70주년, 그때를 되돌아본다! (5)
여순사건 70주년, 그때를 되돌아본다! (5)
  • 김충석
  • 승인 2018.12.02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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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선 3•5기 여수시장

15, 삼산면과 초도에도 수난이 불어 닥쳐

1930년대부터 여수에서 나로도~손죽도~초도의성항~거문도~제주항을 격일제로 운항하던 여객선이 있었는데, 19481020일부터 여객선이 끊어졌다. 의성리 이주환 씨의 웃상점에 라디오가 있어서 여수에서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소문이 쫙 퍼져나가서 객선이 못 온줄 알았다.

광주 4연대에 있던 대동리 출신 백정인 중사의 소개로, 5월에 김갑천, 박구환 두 청년이 14연대에 지원하여 갔다. 10월 중순 김갑천 씨는 정신분열증세로 제대하여 귀가 하였는데,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하자, 박구환 씨의 아버지 박홍삼 씨는 의성리 구장을 하고 있었는데, 가족들은 물론 온 동네 사람들이 걱정하며 안절부절 하였다. 반란소식이 난지 며칠 후에 김갑천 씨의 병은 깨끗이 완치되어 선산이 돌봤다는 소문이 퍼졌다. 여수에 유학을 보낸 가정에서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고 애를 태웠다. 그러던 어느 날 밤중에 여러 사람들이 진막리 쪽에서 등불을 앞세우고 의성리로 들어오면서 총소리가 요란하더니 구장 나와, 구장 나와큰소리로 외쳐 동네사람들이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아침 일찍 구장 밑에서 마을 일을 돕고, 동네 대소사에는 정해진 곳마다 돌며 욋소리를 하는 박두회 씨가 동네사람 다 들어 보시오~~~오늘은 혁명군들이 들어와서 인민재판을 한다고 합니다. 지금 바로 어른들은 한사람도 빠지지 말고 동각마당으로 나오랍니다. 안 나온 사람은 죽인다고 하니 어서 나오십시오.” 평소와 달리 떨리는 목소리로 세 번 외치고 가는데, 여수에 반란이 일어나서 마구 죽인다는 소문에 긴장하고 있었고, 간밤에 총소리가 나고 시끄러워 잠도 설친 어른들은 인민재판 한다는 소리에 더 놀라 두려워 떨며 동각마당에 모였다.

김상신 씨 등 다섯 사람의 손을 뒤로 묶어 세워놓고,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 위대한 김일성 장군님이 영도하는 용맹한 인민군대가 이승만 괴뢰정권을 타도하고, 우리 남조선인민을 해방시키기 위해 38선을 밀고 내려오고, 여수 신월리에 주둔한 14연대 혁명군들이 19일 저녁에 봉기하여, 여수경찰서를 점령하여 경찰서장을 비롯해서 검둥개 새끼들과 우익놈들을 다 쳐 죽이고, 순천도 점령하고 북으로 쳐 올라가고 있어, 며칠 후면 인민군대와 서로 만날 것이다. 남조선도 위대한 김일성 장군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세상이 되면, 소작도 없어지고 노동자 농민의 세상이 되어, 빈부귀천 없이 누구나 똑같이 행복하게 잘 사는 나라가 될 것이다. 여러분도 위대한 김일성 장군을 맞이할 채비를 하라고 하면서 연설을 마치고, 스스로 박수를 치자 동네사람들과 학생들도 따라서 박수를 쳤다.

다른 한 사람이 나와서 이 다섯 사람은 5·10 선거에 앞장서서 인민재판으로 죽이려했으나, 잘못을 뉘우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위해 충성을 맹세했고, 구장 박홍삼씨 아들이 14연대 혁명군이라 하니, 우리의 동지요, 동무들을 봐서 목숨은 살려주겠소.”하는 소리에 벌벌 떨고 있던 동네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반란군의 선창에 따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 위대한 김일성 장군 만세! 14연대 혁명군 만세! 삼창을 하고 어른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학생들은 동각청안으로 들어가라하여, 청안으로 들어가 앉으니 칠판에 처음 보는 기를 그려놓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기라면서,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국으로 시작되는 김일성 장군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

그들은 14연대 군인이 아니고, 고흥 쪽에서 배를 타고 들어온 남로당원들이었다. 김승복 씨는 동네사람들을 살려주었다고 송아지를 잡아주고 남은 쇠고기를 소금에 절여주고, 자기들이 거문도로 가겠다고 하여 방정대 씨의 상고선에 태워 거문도에 내려주고 배만 돌아왔다.

다음 날 오후에, 대동리 출신 이봉희 대위가 정장을, 정갑주 중위가 기관장으로 있던 해군 두만강호가 전에도 가끔 기항(寄港)을 했었는데 의성항으로 들어와서 정박(碇泊)하였다. 여기저기 총알 자국에 분필로 동그라미를 그려놨는데, 여수신항을 출발하여 장군도를 돌아 나오다가 반란군들이 쏜 총알에 맞은 자국이라면서 해군들은 다치지 않았다고 하였다. 해군소위가 동각에 들려 인민공화국기와 김일성장군 노래가 써진 칠판을 보고 권총을 쐈다. 어른들과 방정대 씨 뱃사공의 말을 들어보고, 바로 거문도로 가서 반도들을 붙잡았다. 그들에 의해 급히 만들어진 남로당원 명부에 적혀 있던 삼산면 사람들을 여수로 싣고 나갔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종산국민학교(중앙교)에서 심사를 받고 있었는데, 김종원 대위의 닛본도(日本刀)에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고, 학교 뒷밭에서 즉결처분을 받은 사람, 다른 곳으로 끌려가서 죽은 사람, 운 좋게 재판에 넘겨진 사람도 있다. 부산 5연대 백두산 호랑이 김종원 대위는 시내에 반란군이 없자, 섬으로 도망 간줄 잘못알고 가 봐도 없어 돌산에서 지방민 3명을 죽이고 남면 안도로 건너갔다.

반란이 일어나자 치안을 맡고 있던 안도지서 경찰들이 모조리 도망쳐버려 섬의 공안질서가 공백이 되었을 때, 김부용 등 똑똑한 동네 청년들이 자위대를 조직하여 치안을 유지해 왔는데, 동네사람들을 안도국민학교에 모이라 하고, “이중에 자위대는 나오라고 하여, 젊은이들은 그동안의 노고에 대한 칭찬이라도 할 줄 알고 20여명이 당당하게 나가서 줄을 섰더니, 김종원 대위가 상을 주는 대신 운동장 끝은 바다인데, 줄줄이 세워놓고 모조리 쏴 죽였다는 등 흉흉한 소문으로 뒤숭숭하더니, 몇 사람만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오자, 섬마을이 초상집으로 변해버렸다.

삼산면 사람으로 여순사건으로 희생된 거문도 사람들이 96, 손죽도 8, 소거문도 3명이고, 초도는 9명인데 대동리 박동호, 허창기, 강상규, 배기옥, 김한두 씨가 여수에서 희생되거나 징역을 살다가 6·25때 희생되었다. 강수남 씨는 다행히 진주형무소에 수감되어 만기 출소하였다.

의성리 박선동 씨는 초도어업조합 옆집에 살았는데 의성리 인민위원장으로 여수에서 희생되고, 김승태 씨는 부위원장으로 모진 고문에 왼쪽 어깨뼈가 부러졌지만, 시종일관 동네 사람 5명이 5·10선거에 앞장섰다고 인민재판으로 죽인다는데 내 동생도 묶여있어 살리려고 시킨 대로 이름만 써 주었을 뿐, 그들이 떠난 뒤에 아무 것도 안했다고 끝까지 주장하여 구사일생으로 살아왔다.

14연대 박구환 씨는 벌교에서 삐라를 보고 자수하여 재판을 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형 박재환 씨가 19501월에 면회를 하고 와서 석방될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6·25사변이 나서 사흘 만에 서울을 뺏기면서 서대문형무소와 마포형무소의 재소자들이 인민군에 의해 문이 열려, 무섭게 설쳐 대는 것을 뒤늦게 알고, 대전에서 후퇴하던 군인들이 다시 돌아와서 모든 재소자와 함께 형기와 상관없이 처형되는 불운을 당했다.

남로당 명부에 있거나 살아 돌아온 분들을 보도연맹원이라 불렀다. 거문도에 있는 삼산지서로 데리고 가서 가끔 교육을 받고 오곤 하였다.

6·25사변이 나서 여수와 나로도까지 점령되고 낙동강 전투가 한창이던 19508월 말경, 거문도조합배가 와서 초도에서 20여명을 거문도지서로 싣고 갔다. 진막리 박수봉(박갑안) 씨는 인품이 훌륭하고 덕망이 높은 분인데, 나로도에서 피신해온 고종사촌을 숨겨주었다 하여, 거문도출신 의용경찰 김덕운에게 모진 매를 맞고 91(음력 729) 돌아가시자, 거문도어업조합배가 밤에 의성리로 싣고 왔고, 땜마로 옮겨 선창 안으로 들어오는데 같이 갔던 사람들이 통곡을 했고, 비보를 듣고 달려온 유족들과 함께 온 동네가 울음바다가 되고 원통해 하였다.

대동리 김상곤 씨의 증언에 의하면 진막리 박기웅 씨는 14연대에 갔다가 죽었고, 강동기 씨는 이봉희 정장이 살려주어 이장도 하고 삼산면 의회 의장도 하였다. 그 때 여수수산중학생들이 많이 가담했었는데, 진막리 박강호(초도교 9)씨는 2학년인데 수산중학생이라고 오동도에 잡혀가서 죽는구나 생각하고 있을 때, 이봉희 대위가 찾아와서 삼산면 학생들을 데리고 나오라해서 살았다고 하였다.

거문도 임길동 씨는 14연대 군인이었지만 살아서 경찰도 하고 1998년에는 여천군의회 의원을 하고 있었는데, 여수지역사회연구소에 증언하기를 그때 두만강호를 타고 갔던 사람들이나 그 가족들이 이봉희 때문에 죽었다고 표현을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을 안 합니다. 14연대 군인이었던 우리도 살렸는데, 일부러 고향사람들을 죽이려고 다른 사람들을 잡으러 갔겠습니까?” 하였다.

6·25사변이 나자 여객선을 해군에서 징발하여 거문도 학생들은 어업조합배를 이용했고, 초도는 대동리 배상수 씨의 상고선을 이용했는데, 1954년 여름방학이 끝날 때 거문도 조합배가 손죽도를 거쳐 초도학생들도 싣고 거문도로 가서, 거문도 학생들을 싣고 역만도 밖으로 항해하며 여수로 가고 있는데, 원정상 면장도 타고, 삼산면민들로부터 동창생들까지 죽였다고 많은 원성을 들어온 이봉희 전 두만강호 정장도 동승하였다. 두 분은 오랜 시간 대화를 하였는데 이봉희 씨가 상부에서 남로당 명부에 올라있는 사람들을 전부 싣고 나오라하여 명령을 따랐을 뿐인데, 육군에서 그렇게 참혹하게 사람들을 처단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면서, 그럴 줄 알았더라면 도망가고 없었다 할 걸, 평생 한()이 되고 후회스럽다.”고 하였다.

16, 14연대반란사건 정부에서 여순반란사건으로

처음에는 여수 14연대반란사건이라 하였으나, 진압이 된 뒤에 건국 초에 군사반란이란 국가의 명예 문제라고 여수순천반란사건, 약칭 여순반란사건으로 확정되어 공식적으로 통용되었다. 문제는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은 명칭만 보고 여수 순천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잘못 인식하게 되고, 실제로 1980년대 중반까지 연좌제에 묶여 행정, 사법고시에 합격도 못하고, 여권이나 선원수첩도 안 나오는 등, 여러 모로 피해를 보면서 참고 침묵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이 많다.

세월이 흘러 화신약국을 경영하는 문정인 여수문화원장은 문화원장으로서의 고유 업무 외에, 지역사회의 각종 현안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여수청년회의소와 함께 시퍼런 노태우 군부정권시대에 한국화약 이전과 여순반란사건의 명칭을 14연대 반란사건으로 변경해 줄 것을 정부에 건의하는 애향심과 대담함을 선보이면서, 여수문예회관에서 세미나도 개최하고, 1990여수문화 제5집 제14연대 반란편을 특집으로 발간하고, 저돌적으로 여수문화원에서 당시 전남동부지역에서 희생된 분들을 널리 알려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199712“50년의 세월이 흘러가 버렸기 때문에, 자료수집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지금이라도 현장인들이 살아 있을 때 기초 작업을 해두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착수를 했지만, 부족한 점이 많을 것이나 이것을 계기로 더 보완되기를 바라면서 우선 수집한 귀중한 자료를 모아 ‘14연대 반란 50년 결산집을 출판한다.”고 하였다.

14연대 반란 5 0

반란군에 의한 광란의 시간

진압군에 의한 학살과 방화의 시간

그 이후 여수사람들은, 사람 많이 모이는데 가지마라

바른 소리 하지마라, 자식 교육 많이 시키지 마라

보고도 못 본 채, 알고도 모른 채,

꿀 먹은 벙어리, 눈 뜬 당다리 되었네! 라는 시를 남겼다.

17, 여순사건으로 인맥이 끊어진 여수!

여순사건과 뒤이어 터진 6·25 한국전쟁으로 좌우익으로 갈려,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어 인맥이 끊어졌다. 1950년대부터 1980년대 초 까지만 해도 어른들이 모이면 똑똑한 사람들은 반란사건으로 다 죽고, 저런 것들이 나서서 유지라고 설쳐대니 한심스럽고 안타깝다.’고 하였다.

18, 여수순천1019사건, 약칭 여순사건으로 변경

향토사학가 김계유 선생은 1987여수여천반란사란 책을 펴내면서 처음으로 여순반란사건‘14연대반란사건으로 명칭을 변경해야한다고 했고, KBSMBC에 출연하여 명칭 변경의 당위성을 제기하였다.

1992년부터 여수문화원 문정인 원장과 여수청년회의소가 함께 명칭변경운동을 하였고, 그 해 1220일 신순범 국회의원이 대정부질문을 하여 관계부처와 협의하여 여수주둔군반란사건으로 명칭이 변경되도록 적극 노력하겠다.’는 답변을 얻어냈다.

1994년에 여수문화원, 여수청년회의소, 여수로타리클럽, 여수지역발전협의회가 힘을 합쳐 여순반란사건을 14연대 반란사건으로 명칭 변경운동을 다시 시작하였다. 그러나 국방부에서 반대하여 교육부에서 여수순천 10·20사건으로 변경한다고 하였으나, 실제로 사건이 터진 날은 1019일이라고 주장하여, 최종적으로 여수순천 10·19사건,’ 약칭 여순사건으로 정부에서 확정해주었다. 늦게나마 여수와 순천사람들의 명예와 자존심을 회복하였다.

1995년 여수여천지역사회연구소를 만들면서 필자는 초대회장으로 여러 가지 현안 외에 여순사건을 재조명하고 용서와 화해를 통하여 위령탑도 만들고, 미래로 나가는 중장기 발전계획을 세워 실천하기로확정하고 추진하였다. 여수지역발전협의회장으로 97. 9. 1 저녁 현대웨딩프라자 3층 홀에서 구국의 성지 전라좌수영 여수! 왜 삼여통합을 해야 하는가?’란 소책자(속표지에 여순사건과 위령탑 모형)를 나눠주면서, 여수시장과 시의회의장, 여천시장과 시의회의장, 여천군수와 군의회의장과 시·군의원들을 비롯하여 여수여천지역 주요기관장과 시민사회단체대표들, 국제봉사단체 대표들과 주요언론기관, 재경여수향우회 회장단 등 200여명을 자비로 초청하여, “그동안 정부주도로 실시한 통합에 여수는 세 번이나 실패하였지만, 불씨를 되살려 전국 최초로 주민발의에 의한 삼여통합 투표일이 99일로 다가오는데 마지막 기회입니다. 한 지붕 세 가족이 다시 하나로 뭉쳐 2010년 여수세계박람회도 유치하여 세계적인 도시로 만들고, 50년 전 해방 공간에서 좌익이 뭔지, 우익이 뭔지도 모르면서, 대한민국 정부수립 두 달 만에 터진 14연대 반란사건으로 수많은 사람들과 인재들이 너무나 억울하게 희생되어 여수에 인물이 없다고 합니다. 200810월이면 여순사건 60주년이 됩니다. 당시 영내에서 사병들에게 영문도 모르고 사살되거나 찔려 죽은 26명의 장병과, 반란군을 막고 경찰서를 지키다가 전사하거나 길거리에서 순직한 72명의 경찰관과, 억울하게 참변을 당한 16명의 우익인사들에 대한 명예도 되살리고, 진압과정에 억울하게 좌익으로 몰려 희생된 사람들과 형기 중에 전쟁이 터져 후퇴하면서 처형당한 사람들의 명예도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서로 용서하고 화해해서 여수시민으로 하나가 되어, 흰색 초롱불 등잔 모형으로 합동위령탑도 만들고 미래로 나아갑시다.”하였더니 만장의 박수를 받았다.

다음날부터 여수시의회와 시민사회단체, 국제봉사단체들이 행사를 계속 이어나가서 99천신만고 끝에 삼여통합이 성사되어, 199841일 전남 제1의 여수시가 탄생되었다.

2008년 여순사건 60주년에 대비하여 여수시와 시민단체가 준비하고 김충조 국회의원은 여순사건특별법을 국회에서 추진하고 있었으나, 노무현 대통령 탄핵후폭풍으로 낙선하고, 필자도 출마를 못해 지나쳐 버렸다. 또 다시 70주년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더 이상 일 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19, 여순사건특별법을 만들어, 용서하고 화해하고 미래로 나아가자!

요즘 분위기가 호전되어 여순사건특별법을 만들자는 기운이 감돌고 있다. 바라기는 14연대 반란 당일 영내에서 살해당한 26명의 국군장병과 20일부터 전사하거나 살해된 72명의 경찰관과, 지역 유지 16명과, 진압과정에서 무참히 억울하게 죽어간 수많은 민간인들의 희생과, 시가지에 불을 질러 모든 재산과 귀중한 기록물들을 몽땅 잃어버린 여수주민들의 한과 연좌제에 묶여 오랫동안 고생한 사람들의 아픔을 씻어줄 때도 너무 늦었지만, 기왕에 순천을 비롯한 다른 지역의 피해 상황까지도 함께 조사하여 더 늦기 전에 객관적 진실을 밝히고, 유족들도 지나간 일은 서로 잊고, 용서하고 화해하여 위령탑도 함께 세우고, 더불어 미래로 나아가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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