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70주년, 그때를 되돌아본다! (1)
여순사건 70주년, 그때를 되돌아본다! (1)
  • 김충석
  • 승인 2018.12.01 14: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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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선 3•5기 여수시장

여순사건 70주년, 그때를 되돌아본다!

 

민선 35기 여수시장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시장님 서명파일.jpg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21pixel, 세로 100pixel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 국내외적으로 높이 평가 받는 것은 사관(史官)들이 쓴 사초(史草)와 실록(實錄)은 제아무리 임금이라 할지라도 볼 수 없도록 만든 제도 때문에,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기록했기 때문이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지만, 여순사건을 사실대로 쓰려고 애썼습니다,

1, 한반도 역사상 처음 치른, 총선거의 배경과 당시의 상황

1947917일 제 82UN총회에 한반도의 독립문제가 상정되었다. 상정된 내용은 ‘UN감시 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동시에 실시하여 그 국회로 하여금 한반도에 통일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UN 한국위원단을 한국에 파견하자는 미국 측 제안이 19471114UN 총회에서 43:0, 기권 6으로 가결되었다.

그러나 한국에 파견된 UN 한국임시위원단은 미군정에서는 적극 협조한데 반하여, 소련군정의 방해를 받고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미국이 태평양전쟁에서 고전하면서 소련의 대일본전 참전을 계속하여 독촉하였지만, 독일이 항복하면 바로 일본과 싸우겠다고 약속하고 56일 독일이 항복했음에도 전 세계를 적화하겠다는 속셈으로 동구권 적화에만 힘쓰면서 참전하지 않고 눈치만 보다가, 194589일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진 것을 보고, 더 이상 참전을 늦춰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소련이, 관동군이 철수하고 텅 빈 만주국경을 즉시 넘어 들어오고, 다른 부대는 김일성을 앞세우고 두만강을 건너 38선 이북을 완전히 점령하고 소련군정을 펼쳤다. 동유럽에서처럼 바로 김일성을 수반으로 하는 공산정권을 수립하기 시작하여 틀을 갖춘 소련은, UN 한국위원단을 북한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38선에서 철저히 막아버려 이런 사정을 UN 소총회에 보고하였다.

이에 대하여 194826UN 소총회에서는 가능한 지역 내의 선거실시에 관한 권한을 UN 한국위원단에 부여하는 권한을 채택하였고, 이에 따라 UN 한국위원단과 미군정(美軍政)1948510일 월요일에 역사적인 총선거 실시를 발표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미군정은 남한에 자유민주주의 정부가 수립되면, 미군을 철수하려고 1946년부터 국방경비대와 해안경비대를 양성하며 준비하고 있었다.

2, 여수주둔 14연대 창설

1948년 들어서면서 정부 수립이 가시화되자, 미군정에서는 일본이 1943년부터 태평양전쟁이 어려워지자, 미국군함들과 최후의 결전을 하려고 일본해군 항공기지로 만들고 있던 여수 신월리에 콘세트 막사를 더 많이 치고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미군 철수에 대비하여 광주주둔 4연대에서 차출된 1개 대대의 부대원들로 14연대를 창설하고, 수원주둔 11연대, 마산주둔 15연대도 같은 날 창설하였다.

14연대에 경비사관학교 3기생인 김지회와 홍순석 중위 등 좌익계 장교들과 지창수 등 40 여명의 하사관이 군기대(軍紀隊)의 주목을 받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좌익 성향의 인물들로만 따로 뽑아 14연대로 보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짧은 시간에 전라남도 동부 6군에서 신 대한 국방군을 활발하게 모병(募兵)하여 연대병력을 충원하였다.

14연대 막사가 있던 신월리 (현재 한국화약 여수공장 터)

3, 대한민국 정부수립

김 구 선생의 한독당과 남로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극히 일부지역을 제외하고 평온한 가운데 510일 월요일, 한반도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보통, 직접, 평등, 비밀이란 선거의 4대 원칙에 따라 당시에는 여러나라들에서 여성에게는 참정권도 안주었는데,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따라 여성에게 참정권을 주어 총선거가 실시되어 국회의원을 뽑았다. 제헌의원들은 국호를 대한민국이라 정하고 717일 토요일 헌법을 공포하여 제헌절이라 부르고 국경일이 되었다. 헌법에 따라 국회에서 국회의장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이시영을 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화장에서 이범석 장군을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으로, 여성인 임영신 중앙대학교 총장을 상공부장관에 임명하는 등 124처의 조각을 마치고, 김병로 변호사를 대법원장으로 임명하였다. 1948815일 일요일에 명실상부한 3권 분립의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여, 맥아더 원수로부터 군정을 이양 받아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되었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정부수립일(48.8.15) 맥아더 이승만 모습01.jpg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496pixel, 세로 324pixel

사진 찍은 날짜: 2018년 11월 05일 오후 8:40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정부수립일(이승만연설).jpg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639pixel, 세로 564pixel

사진 찍은 날짜: 2018년 11월 05일 오후 8:35

사진: 맥아더 원수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군정을 이양

4, 14연대 반란사건, 하루 만에 여수와 순천을 점령하고 사전에 장교와 하사관을 사살한 뒤, 새벽부터 경찰과 우익인사들 사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고는 하지만, 제도와 법과 질서를 만드느라 아직 체제가 정비되지 못한 두 달 만에, 여수 신월리에 주둔하던 14연대에서 일어난 반란사건은 20일 아침부터 지방 좌익이 참여하여 전남 동부지역 6개 군으로 크게 번져나갔고, 반란 진압 후에 숙군파동(肅軍波動)으로 이어지면서 대한민국의 반공체제를 형성하는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

1019일 화요일, 여수주둔 14연대는 제주도 출병을 위한 준비로 하루 종일 분주했다. 개인장비를 제외한 출동부대의 보급품, 탄약 등의 선적작업(船積作業)이 진행되고 있었고, 제주도로 떠나갈 제1대대 사병들은 6시까지 저녁식사를 마친 뒤 군장을 꾸려 출발하기 위해 내무반에서 휴식하고 있었다. 여수에 잔류하는 2대대와 3대대 사병들은 출동부대의 뒤처리와 함께 가지고 갈 도시락을 준비하였다.

7시 경에 장교식당에서 출동부대의 환송을 겸한 회식을 마친 뒤, 14연대장 박승훈 중령과 부연대장과 참모들은 여수신항 부두의 승선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여수항으로 나가고 없는 상태였다. 부대 내에는 3개 대대장과 연대참모, 1,2,3,7 중대장과 근무 중대장이 있었다.

연대 인사계 지창수 상사와 40여명의 동조자들은 미리 준비한대로 병기고와 탄약고를 사전에 점령하고, 장교들은 보는 대로 사살하고, 예광탄 3발이 오르면 비상나팔을 불어 사병들을 집합시켜 반란을 시작하기로 계획하고 실행하였다.

병기고와 탄약고는 좌익계 하사관들이 점령했고, 다른 조는 제1대대장 김일영 대위, 2대대장 김순철 대위, 3대대장 이봉규 대위, 연대 정보주임 김래수 중위, 작전주임 강성윤 대위와, 진도연, 이병우, 길원찬 중위와, 김록영, 명택호, 박경술, 민병여, 김진용, 이상술, 장세종, 이병순, 유재환, 김남주, 김일득, 노영우, 이상기, 소위 등을 사살함과 동시에 저녁 750분 비상나팔을 불었다.

총성과 비상나팔 소리에 놀란 병사들은 무슨 일인가하여 연병장으로 나오기 시작했는데, 지창수 상사가 무엇을 꾸물거리느냐 경찰이 공격해 왔는데 빨리 무기고에 가서 총과 탄약을 가질 수 있는데 까지 가져와라, 경찰이 온다. 나오지 않는 놈은 쏴 죽인다.”고 협박하였다.

이런 와중에 2대대 5중대의 주번사관 박윤민 소위는 집합나팔을 이상하게 생각하며 연병장으로 나갔다가 보초에게 주번사관이다. 쏘지 말라고 외치면서 가까이 갔다가 배에 관통상을 입고 쓰러졌지만, 치명상을 면해 주위가 조용해진 틈을 타 양팔로 7~80m를 기어 피투성이인체 대대막사에 도착하여, 김원기 중사가 침대에 뉘어주고 나갔는데 밤새 통증에 시달렸다.

아침이 됐는데 뜻밖에 어제 저녁 주번사관 임무교대를 하고 시내로 나갔던 김지회 중위가 왜 왔는지 들어와서, 들것에 실어 시내 순천병원으로 후송해주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나중에 대령까지 승진했다. 1대대 부관 김정덕 소위가 사병들에게 매를 맞는 것을 보고, 조병모 소위가 왜 장교를 때리느냐?”고 외치자, 즉각 조 소위를 찔러 죽였고, 그 틈을 타서 도망친 김정덕 소위는 나중에 준장까지 승진했다.

여수 출항시간은 저녁 10시였고, 주둔지인 신월리를 떠나 함정이 정박하고 있는 여수 신항부두 까지는 도보로 1시간 정도가 소요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나팔소리는 1시간이나 빨랐지만 출발 시간이 앞당겨졌다고 생각하고 서둘러 군장을 꾸려 연병장에 집합한 출동부대와 잔류부대원 2,700여명의 병사들을, 무장한 하사관들이 빙 둘러서서 총부리를 겨눈 가운데, 지창수 상사가 단상에 올라가 지금 긴급 정보에 의하면 여수경찰이 평소 우리와의 사소한 충돌로 반감을 품고, 전 일본해군을 동원하여 여수에 상륙하여 우리 연대를 포위 공격하려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제주도 출동에 앞서 이들 악질반동 경찰과 일본군을 타도해야한다. 나아가서 우리는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에 반대한다. 우리는 남북통일의 정부를 진정으로 원한다. 지금 북조선의 인민군도 남조선 해방과 일본군을 격퇴하고자 38선을 넘어 남진 중에 있다는 소식이다. 우리도 이젠 인민해방군으로써 악질반동 경찰을 쳐부수고 북상하는 인민군대로서 지금부터 행동을 한다. 모두 나와 뒤를 따르라고 선동하자, “! 지창수 너 빨갱이구나하는 하사관 3명을 바로 쏴 죽여 연대를 장악하고, 살육과 공포 분위기속에서 총과 실탄을 지급하고 출동하였다.

고인수(高寅洙) 여수경찰서장은 14연대 군기대(헌병)로 부터 반란이 일어났다는 통고를 받고, 서원들에게 비상소집 명령을 발령했다.

새벽 120분 경 여수 읍내로 진입하기 시작한 반란군은 연등천에서 여수경찰과 군기대와 부두에 파견 나와 있던 14연대 군인들로 이루어진 총 70여 명의 저항에 부딪혔지만, 소수의 병력으로는 반란군의 병력과 화력을 막아낼 수 없었고, 사상자가 속출하면서 방어선은 금세 무너졌다.

인근 주민들은 총소리에 놀라 잠자리에서 깨어났지만, 1013일 새벽에 14연대는 두 개의 부대로 나뉘어 시가전 예행연습을 실시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군인들이 시가전 연습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침에 여기저기 경찰관들의 시체가 보여 깜짝 놀랐다.

반란군이 새벽 3시경 여수경찰서를 습격하자, 비상소집으로 대치중이던 100여명의 경찰은 전투과정에서 전사하거나 도망을 쳤지만, 잡힌 즉시 사살되거나 인민재판으로 죽었다. 여수경찰 70명은 제주에 파견 중이었다. 화염에 휩싸인 여수경찰서를 점령한 반란군은 50여 명의 죄수들을 석방했다. 새벽 5시경에 시내 주요기관을 점령하고 인공기(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기)를 내걸었다.

1020일 오전에 여수를 장악한 14연대는 병력을 둘로 나누었다.

김지회 중위가 지휘하는 2개 대대병력은 순천으로 북진하기로 하고, 지창수 상사가 지휘하는 1개 대대는 여수에 남기로 했다.

14연대 군인들은 순천으로 가는 822분 발 통근 열차 5량에 나눠 타고 여수를 출발했다. 열차는 군인들로 빽빽이 들어찼고 지붕위에도 올라탔다. 군인들은 경찰을 타도하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생각에 상당히 고무되어 있었지만, 자신들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여수에 남아 있으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어떤 사람은 총을 쏘고, 어떤 사람들은 공포로 침묵하고 있었으나, 대부분의 병사들은 노래를 불렀다. 가는 도중에 총기 오발로 군인이 죽는 일까지 벌어졌다. 군인들은 율촌역에서 잠시 정차하여 동태를 정찰했으나, 아무 이상도 없음을 확인하고 순천으로 향하여 930분 경 순천역에 도착했다. 14연대 병력이 순천역에 도착하자, 순천에 파견 나와 있던 홍순석 중위가 지휘하는 병력이 즉시 반란군에 합류했다. 순천 주둔 병사들이 합류하여 기세가 높아진 반란군들은 순천철도사무소에 인민군사령부를 설치하고 순천을 포위 공격하기 시작했다. 반란군은 1030분 경, 세 방면에서 순천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순천 광양 삼거리에 배치되었던 경찰 병력은 일순간에 무너져 100여 명이 전사했다. 여수를 점령한지 몇 시간 만에 순천까지 장악한 홍순석, 김지회 중위는 14연대를 밤사이에 3개의 부대로 재편성하였다.

21일 첫 번째 부대는 보성, 화순, 광주를 점령하기 위해 서쪽 벌교로 쳐들어가고, 주력부대는 구례, 곡성, 남원을 점령하기 위해 북쪽 학구방면으로 쳐들어 올라가고, 세 번째 부대는 하동을 발판으로 경상도로 쳐들어가기 위해 동쪽 광양방면으로 진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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