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14연대 반란군지휘부, 남로당 중앙이나 여수좌익과 사전 교감은?
① 사건 당일, 주간 주번사관 김지회 중위는 저녁 주번사관 박윤민 소위에게 인계하고 시내로 나갔는데, 초저녁에 반란사건이 일어났고, 아침에 와서 둘러보고 자기를 후송시키고 시내로 나가서 합류한 것을 보면, 중앙당에서 관리하고 있던 김지회 중위는 14연대의 반란을 사전에 전혀 알지 못했고, 지창수 그룹도 김지회가 남로당원임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② 사건 당시 여수일보 편집국 차장이었던 신양남 씨는 1990년 발행, 여수문화 제5집 ‘14연대 반란편’에서 –전략- 하룻밤 사이에 세상이 뒤바뀐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도대체가 무슨 영문인지 가닥을 잡을 수 없었다. 어쨌든 숙소로 다시 돌아와 생각하고 있는 판에 뜻밖에 당시 여수지방 좌익계의 거물급이라 할 수 있었던 유목윤 씨가 찾아왔다. 그는 나와 동갑이지만 내 외가로 당숙 뻘이 되는 사람인데 “도대체 어젯밤 사태가 어떤 영문으로 일어난 것이냐?”는 질문이었다. 물론 나 자신이 자다가 물벼락 맞은 격이어서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가 다녀간 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난리가 지방 좌익계와는 아무런 연락이 없이 일어났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후략- 결국 유목윤 씨는 아무 곳에서도 정보를 들을 수 없었기에, 지창수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지방 좌익들과 발 빠르게 인민대회를 준비했고 보안서장도 맡아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③ 당시 남로당 중앙 총책이던 박갑동(1919년생, 통곡의 언덕에서) 씨가 순천에 내려와서, 지창수와 만나 현황보고를 받고 “누구누구 중위와 아무개, 아무개 소위는 지금 어디 있냐?”라고 질문하자, 지창수가 “장교들은 미제국주의 앞잡이들이기에 19일 밤 거사하기 직전에 보이는 대로 쏴 죽였습니다.” 하자, 깜짝 놀라며 “그들은 육군 내 장교들의 중요한 세포조직 책임자들이다.”라고 하였다. 결국 남로당 중앙과도 사전에 조율이 없었고, 장교와 사병 간에도 서로 당원인지를 모르는 철저한 비밀조직이었다.
④ 6·25 한국전쟁의 영웅 백선엽 예비역 대장은 ‘실록 지리산’에서 “여순반란사건은 결코 남로당 중앙의 지령에 의한 것이 아니다. 제주 4·3과 마찬가지로, 남노당 말단에서 빚어진 자의적인 행동이었다.”라고 밝혔다.
<계속~>
[여수인터넷신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