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영훈 박사, "세계적 생각이 중요"(2)
곽영훈 박사, "세계적 생각이 중요"(2)
  • 김혜미
  • 승인 2021.05.20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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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대전엑스포· 2010 · 2012여수EXPO
                  당시 큰 활약을 했던 곽영훈 박사가 최근 쓴 글들 중
                 엑스포(EXPO) 관련 글들을 5회에 걸쳐 연재한다.
 

 

 

EXPO(엑스포·세계박람회)

과학기술 강국을 향한 큰 걸음, 대전엑스포

임마누엘: 이번에는 엑스포에 대해 얘기를 나눠 보죠. 엑스포는 올림픽, 월드컵과 더불어 세계 3대 빅 이벤트입니다. 올림픽과 월드컵이 스포츠 행사라면 엑스포는 첨단과학기술과 문화가 한자리에 모이는 지구촌 최대의 과학·경제·문화축제입니다. 엑스포는 1851년 영국 런던에서 처음 개최된 이후 지난 170여 년간 증기기관차나 전화기·자동차·TV·컴퓨더 같은 인류사에 한 획을 긋는 신기술의 거대한 전시장이 되어 왔습니다. 또한 엑스포는 미래의 전망을 특정한 주제하에 한자리에 모아 비교·전시하고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새로운 문명창조에 결정적으로 기여해 왔습니다.

 

1964 뉴욕 세계박람회(World’s Fair) 방문이, 대전엑스포의 씨앗

임마누엘: 대한민국의 대전엑스포도 박사님께서 유치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엑스포는 올림픽과 성격이 다르잖아요.

곽영훈 : 많이 다르지요. 올림픽은 스포츠 축제이고, 엑스포는 미래의 과학과 문명이 어떻게 전개돼야 하는지를 보는 행사니까요. 그래서 시설들이 경기장이 아니라 대회장이나 전시관들로 구성되고요. 앞으로의 세계, 환경, 신소재, 커뮤니케이션 등을 전시하고 제시해야 하니까요. 어떻게 보면 올림픽보다 사후 활용과 그 기여가 더 광범위한 행사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엑스포 유치에 대한 꿈은 미국 유학 시절인 1964년 데비라는 천사 같은 여학생의 배려로 뉴욕 세계박람회(World’s Fair)를 두루 살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후 외국에서 열리는 멋진 국제행사들을 참관하면서 국가와 도시발전의 핵심개념으로 삼아야겠다고 마음먹었었지요.

대전엑스포는 1981년 말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에게 처음 제안했습니다. 워낙 탁월하고 청렴하시며 저를 101% 신뢰해 주시던 김 수석이 흔쾌히 호응하면서 구체화 됐지요. 그러나 너무나 안타깝게도 김 수석은 1983109일 버마 아웅산 테러로 엑스포의 결실을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 노태우 정부는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마친 1988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엑스포 준비에 들어가 1989년 대전엑스포 개최 의지를 공표했습니다. 198912월에 열린 국제박람회기구(BIE, Bureau of International Exposition)는 총회에서 대한민국에 조사단을 파견하기로 했고, 마침내 1990년 만장일치로 대전엑스포 유치가 결정됐습니다.

대전엑스포는 엑스포 역사상 최초로 선진국 위주의 축제에서 벗어나 개발도상국에서 개최됐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큽니다. 실제로 대한민국은 유치전에서 선진국과 개도국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방식으로 파리에 본부를 둔 BIE와 갓 취임한 로세르탈레스V.G.Loscertales 사무총장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임마누엘 : 올림픽이나 월드컵 때처럼 엑스포 유치 과정에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나요?

곽영훈 : 없을 리가 있겠어요. 우선 엑스포 개최가 공표된 날로부터 신청 시점까지 시간이 너무 촉박했습니다. 더욱이 1992년에 개최하기엔 준비 기간이 너무 짧았습니다. 당시 개발도상국이었던 우리나라로서는 개최 비용도 버거웠고요. 박람회장에 대한 변변한 설계도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개최 시기를 1992년에서 1993년으로 변경했지요. 이런 사실은 잘 모르셨을 겁니다. 누구도 그게 가능할지 몰랐지만 밀어붙여 보라고 했지요. 나웅배 의원이 대전엑스포 초대 위원장이었는데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그 바탕에서 1년 후로 연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제 개념과 대회장 마스터플랜을 더 정교하게 다듬기 시작했습니다.


대회장 마스터플랜 : 세계, 인간, 환경, 미래를 한자리에,


임마누엘: 전시관을 둘러보니 대전엑스포와 관련된 책자와 자료들이 엄청나게 많더군요. 엑스포 주제를 잡는 일부터 대회장 마스터플랜 계획까지 모두 직접 하셨나요?

곽영훈 : . 주제 개념은 이미 오래전 한반도 활성 축을 그을 때부터 서울올림픽 주제와 병행시킬 개념으로 생각해 두고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사회는 급속한 산업화의 폐해로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가 상당수 파괴되고 지역·계층 간 불균형과 환경오염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었어요. 아무리 환경을 외쳐도 잘 듣지 않던 시대였습니다. 압축 성장의 극심한 후유증이었죠. 그래서 대전엑스포는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조화로운 발전에 주목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더불어 세계, 인간, 환경, 미래를 생각하고 자연과 인간의 조화라는 또 하나의 목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온 대전엑스포 주제가 새로운 도약에의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전통기술과 현대과학의 조화자원의 효율적 이용과 재활용두 주제를 부제로 정했지요. 뒤이어 태극을 변형한 엠블럼과 마스코트 꿈돌이가 만들어졌고 과학도시 대전을 상징하는 한빛 탑도 세워졌고요. 덧붙여 엑스포의 주제 개념을 세부지침에 담기 위해 세 가지 방향을 설정했습니다.

하나는, 엑스포 진행 계획은 개별적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각각의 활동은 궁극적으로 주제 개념으로 통합되도록 긴밀하게 연계해야 한다. , 이전까지의 엑스포들이 보여주는 것 위주의 물질 문명적인 전시에 치중했다면, 대전엑스포는 개개인의 내적 체험에 비중을 둬야 한다. , 엑스포 주제의 구현은 행사 기간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엑스포 시설과 이미지의 사후 활용에도 적용시켜 그 파급효과까지 감안해야 한다.’였습니다. 이렇게 엑스포 계획을 준비기간(Pre-EXPO), 행사기간(During-EXPO), 사후기간(Post-EXPO)으로 나누어 분석하고 종합했습니다.

대전엑스포 대회장은 가운데 엑스포탑을 두고, 서쪽으로는 세인환래(세계, 인간, 환경, 미래)’의 테마관을, 동쪽으로는 과거, 현재, 미래의 테마관을 배치했습니다. 그러면서 삼성그룹에 우주세계관을, KT에 통신관을, 쌍용에 지구관을 각각 만들어서 환경문제를 고민하게 했습니다. 특히 현대와 대우그룹에는 미래 꿈의 열차인 자기부상열차를 시험 운행하도록 했고, 포스코에는 새로운 소재, 즉 미래관을 만들게 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과학기술의 길 찾기 개념입니다. 그리고 과거 지구에는 우리문화의 뿌리를, 현재 지구에는 경제성장의 현황을, 미래지구에는 참여하는 국가와 국제조직이 모두 함께 환경친화적 과학기술의 길 찾기를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또한 대회장 내부를 이전에 개최한 다른 나라의 격자식 구조와는 달리 방사형으로 동선을 만들어 관람객들의 입장에서 모든 시설을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했습니다. 대회장은 길 찾기가 쉬워 세계적으로 가장 모범이 되는 박람회장 설계를 했다고 BIE로부터 극찬을 받았습니다.

BIE에서 제시한 문제도 있었는데, 박람회장이 너무 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총 부지 275천 평 중 국제전시구역 76천 평만 BIE의 승인을 받았습니다. 나머지 지역은 우리나라의 자체 행사를 위한 시설이라는 이유로 설득이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철조망을 쳐서 구분이 되어야 한다고 엉뚱한 소리를 하는 우리나라 사람도 있어 잠시 어려움에 빠지기도 했었지요.

도우미(道友美)의 어원

임마누엘: 오늘날 많이 쓰는 용어로 도우미란 단어가 있습니다. 도우미란 단어를 박사님이 처음으로 만들어서 대전엑스포에서 쓰셨다고 들었습니다. 도우미의 어원이 그때가 맞는지요?

곽영훈 : 맞습니다. 요즘 자주 쓰는 단어지만, 그전엔 없던 말입니다.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 인상 깊게 보았던 행사진행요원에서 착안한 용어입니다. 당시 올림픽행사 진행요원들 모두가 경기장 천막과 비슷한 색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색도 그렇고 요원들의 일사불란한 모습도 그렇고 참으로 신선하고 통일감이 느껴졌어요. 뮌헨올림픽 때처럼 대전엑스포 진행요원들에게도 통일감과 의미를 부여하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고민 끝행사진행요원들에게 도우미道友美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남을 돕는 이라는 뜻의 도움이의 연음표기이기도 하지만, ‘길을 찾아주는 아름다운 친구라는 뜻도 담아 EXPO 주제에 맞춰 고안한 것이지요.

도우미라는 이름의 행사 요원들은 대전엑스포의 얼굴이었고, 선발 절차도 엄격히 했습니다. 저는 도우미 선발위원장이었지만 선발심사위원은 국내 패션모델의 선구자 격인 이희재씨와 마침 대전에 살고 있던 배우 유지인씨 등이 맡아, 언어와 워킹walking 테스트를 했습니다. 엑스포 명예도우미는 탤런트 채시라씨가 맡아 활동했습니다. 이렇게 생긴 도우미란 명칭은 이후 행사진행요원을 통칭하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도와주시는 분들을 호칭하며 널리 쓰이게 됐습니다.

 

세계로 통하는 Yeosu! 여수EXPO’

여수에서 다시 한번 엑스포를

임마누엘: 1993 대전엑스포의 마스터플랜을 짠 이후, 2002년에는 2010여수엑스포 유치 중앙위원으로 활약하셨고, 2005년에는 2012여수엑스포 여수시유치위원장으로 취임해서 여수에 엑스포를 유치하고 성공개최시키는 데도 활약하셨죠? 그간의 일들과 유치위원장을 맡으신 경위에 대해 말씀해 주시지요.

영훈 : 잘 아실 것 같은데 호남지역은 경상도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발전에서 소외돼왔어요. 특히 백두대간에서 배의 뱃머리船首와 같은 지형적 위치로 국가발전 활성 축의 최남단 급소지역인 여수는, 전혀 개발계획에 포함되지 않아 많이 낙후됐습니다. 이 뱃머리가 태평양으로 나가고, 또 태평양에서 들어와야 여수 광양 남해 지역이 2000년대 동북아의 홍콩 같은 중심도시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확신이 이미 활성 축을 그으면서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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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 지역의 발전을 위해 오랜 시간을 들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요. 큰 프로젝트만 말씀드리면, 1977년에 여천시 신도시를 설계했고, 한옥으로 여수시청사도 설계했습니다.

1986년에는 여서·문수지구를 설계해서 구 여수시와 여천신도시를 하나로 만드는 기반시설로 준비했습니다. 1995년에는 여천 비전 2020’여수반도관광종합계획을 수립해 주었습니다.

 

임마누엘: 2018 평창동계올림픽이 세 번의 도전 끝에 유치에 성공했다고 하셨는데, 그 이전에 20102012 여수엑스포도 두 번의 도전 끝에 유치에 성공하였군요.

곽영훈 : 그랬습니다. 여수시민들이 참 훌륭하였지요. 엑스포를 유치하기 위해 네 번의 도전 끝에 3(여수시 여천시 여천군) 통합도 하고, 저에게 힘도 많이 모아주셨고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수에는 이순신 장군 같은 애국심과 정직한 뚝심의 소유자 김충석 시장이 계셔서 여수엑스포의 유치와 성공개최가 가능했습니다.

2010 여수엑스포(6개월)의 개최를 신청했던 2002년 당시, 우리나라는 노무현 후보와 이회창 후보의 대선 정국이라 온 나라가 선거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을 때였습니다.

반면에 중국에서는 패전국 일본이 도쿄올림픽을 성공 개최한 후에 오사카박람회를 개최하여 선진국으로 들어섰고, 유일한 분단국인 한국도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면서 88서울올림픽을 성공 개최한 후, 93 대전엑스포(3개월)를 성공 개최하여 중진국 중에서도 탑크라스로 도약하는 것을 지켜본 중국에서는 2008 베이징 올림픽을 유치하고 나서, 상하이(上海)박람회유치 신청을 한 뒤부터 국가 차원에서 발 벗고 나섰어요.

 

상하이와 여수가 공동개최 합시다!

그때 저는 2010 여수엑스포 중앙유치위원으로 김충석 여수시장과 함께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열심히 활동하였는데, 호언장담하는 다른 분들과는 달리 유치에는 역부족을 느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를 공감한 김 시장과 상의 끝에 우리나라는 국제 이벤트를 다른 나라와 공동으로 개최한 경험이 있는데, 바로 2002 한일월드컵이죠. 우리는 일본보다 뒤늦게 유치에 뛰어들었지만, 강력하게 추진하여 결국 공동개최권을 따낸 일이 있습니다. 당시 월드컵 개최 이슈로 대한민국과 일본의 경쟁이 상당히 과열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홍구 구평회 유치위원장에게 한국과 일본이 공동개최하면 어떻겠냐고 제의한 적이 있습니다.

얼마 후에 같은 로터리 멤버인 구 위원장이 일본이 받아줄 것 같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일본도 단독 유치 성공에 확신이 없었는지 받아들여, 2002 한일월드컵은 역대 주요 국제스포츠대회 중 처음으로 2개의 나라에서 공동개최하여 성공한 대회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 후로 외교관계자들은 “2002 한일월드컵 공동개최 때가 한일외교 관계가 가장 좋았었다.’라는 말을 자주 하지요.

김 시장과 논의 끝에 1990년대부터 잘 알고 지내던 룽융투(Long YongTu 龍永圖)는 중국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시켰고, BOAO Forum을 설립하며 초대 사무총장을 지내는 등 중국에서는 영향력이 있는 인물로 외교통상부 차관을 하고 있어, 직접 가서 2010 EXPO를 상하이와 여수에서 공동개최하면 어떻겠냐고 조심스럽게 타진했고, 룽융투를 통하여 중국도 상하이와 여수 공동주최 아이디어에 찬성하고 공식적으로 제의하자고 하였지만, 대한민국은 외국 주재 대사들과 정부 관계자들 BIE 회원국 대표들을 만나고 온 국회의원들이, 여수 단독개최에 문제가 없다며 자신감을 가지는 분위기여서, 은밀히 제의했던 공동주최가 물 건너가자, 위기를 느낀 중국은 장쩌민江澤民 주석이 모나코에서 개최될 BIE 132차 총회를 코앞에 두고 푸틴Putin 러시아 대통령을 중국 베이징에 초청하여 만나고, 고르바초프Gorbachev 전 대통령을 총회 당일 특사로 파견하여 최선을 다하되 결선에서는 상하이를 지지하도록 하는 등 2010 엑스포 유치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데, 그동안 정부유치위원회가 있을 때마다 우려를 표하며 대안을 제시해온 김 시장을 모나코에서는 회의에 참석도 안 시키고, 회의가 끝난 후 김 시장에게 전혀 걱정하지 마십시오, 표를 아무리 점검해도 우리가 53표입니다. 시장님께서는 내일 저녁 유치 성공국 주최 리셉션 때 건배 제의할 준비나 하십시오하여, 우리 둘은 한방에서 같이 지내며 제발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만 하였지요,

역사적인 123일 오전 0930분부터 1230분까지 후보국별 영상물 상영과 수석대표 연설이 30분씩 배정되었는데, 멕시코, 러시아, 한국, 폴랜드, 중국 순서로 하는데, 한국은 1040분부터 1110분까지 배정되었어요,

김 시장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동안의 단점을 보완하고,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김대중 대통령이 여수엑스포는 대한민국 정부에서 하고, 대통령이 바뀌어도 더 잘할 것이니 믿고 지지해 달라고 호소하여 최상의 프레젠테이션이었고, 전윤철 부총리의 연설도 훌륭하였습니다.

폴란드에 이어 중국은 상하이와 회의장을 바로 연결하여 실황으로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장쩌민 총리가 베이징에서 연설을 하니, 너무 멋있고 조화를 이루어 누가 봐도 깜짝 놀랄 기발한 방법으로 연출하여 만장의 박수를 받았는데, 김 시장이 누차 걱정했던 대로 BIE 사무국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 벌어져 충격을 받았습니다.

오찬이 끝나고 14302sea sade 에서 회의가 속개되었는데, 지난 71일 파리 131차 총회에서 BIE 사상 처음으로 도입한 전자투표를 시작하는데, 어느 국가가 어느 도시에 투표한 줄 모르게 하였다. 기호 1번 상하이, 2번 여수, 3번 케레타로, 4번 모스크바, 5번 브로츠와프, 6번 기권이었다. 밑에는 작은 사각형 안에 아라비아 숫자 100여 개가 있는데, 투표할 나라에 대한 표시라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의장이 호출하면 대표들이 나와서 투표기를 가져가고 스크린에 화면이 떴다.

잠시 후 지지한 도시의 숫자 버튼을 누르고 확인 버튼만 누르면 투표가 끝난다라는 투표방법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잠시 후 장내 스피커에서 지금부터 투표를 시작하겠습니다. 준비된 국가부터 투표를 하십시오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1 2 3 4 5 6 괄호 안에 순식간에 파란불이 가득 찼다. 투표를 하면 숫자에 불이 들어오게 되었는데 파란불이 가득 차자, 의장이 투표가 끝났지요? 끝났으면 개표하겠습니다.”라는 말과 동시에, 도시 이름 옆으로 막대 그래프가 그려지면서 끝에 숫자가 표시되었다.

상하이 36, 여수 28, 모스크바 12, 케레타로 6, 브로츠와프 2, 기권 4표로 브로츠와프시가 떨어졌다. 4개 도시가 남아 2차 투표에 들어갔는데 한번 해보셨으니까 바로 하겠습니다. 투표하십시오잠시 후 투표가 끝났기 때문에 개표하겠습니다.” 상하이 38, 여수 34, 모스크바 10, 케레타로 5, 기권 1표로 케레타로가 떨어졌다. 3차 투표에 들어갔는데 상하이 44, 여수 32, 모스크바 12표로 모스크바가 떨어져 나갔다. 4차 결선 투표는 상하이 54, 여수 34, 20표 차로 상하이가 결국 개최권을 따냈지요. 오후 315분이었고 한국은 밤 1115분이었습니다.

 

우리 정부에서 3시간 걸려 새벽 2시에 끝난다던 것이 불과 15분 만에 허무하게 끝나버렸습니다.

분루를 삼키며 밖으로 나오니, 이틀 전 니스공항에 내렸을 때, 에어 차이나 747 점보기만 서 있고 중국 사람들은 대표자들만 보였는데, 광장에는 오성 홍기를 들고 춤을 추는 중국 사람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정보가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험하는 순간이었고, 우리들의 충정을 무시한 지도부가 원망스러웠다.

다음 일정을 포기하고 김 시장님과 둘이서 모나코 해 변 모래사장을 하염없이 걸으면서 작지만 아름다운 여수를 세계에 알렸으니 좌절하지 말고 다시 도전하기로 다짐한 뒤에, 김 시장님은 초조하게 시청에서 낭보를 기다리는 조우현 부시장에게 결과를 설명하고 “5일 저녁때쯤 여수에 도착할 것이오, 추진 해오던 SOC를 정부에서 엑스포 안됐다고 안 해주면 큰일이니, 다시 도전한다고 건의서를 만들어 바로 올려보내시오!” 지시하는 것을 보면서, 충격 속에서도 새로 희망을 키워내는 의연한 모습이 너무 좋아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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