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특별법안에 대한 小考
여순사건 특별법안에 대한 小考
  • ysen
  • 승인 2021.05.04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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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 민선 3·5기 여수시장 김 충 석

 

< 편집자 주 > ‘여순사건 특별법은 지난 200116대 국회에서부터 18·19·20대 국회에서 발의됐으나 상임위에서 논의조차 되지 못하고 계류·폐기됐었다.

이번 21대 국회에서 국회의원 152명의 동의를 받아 지난해 728일 더불어민주당 소병철 의원(순천·광양·곡성·구례갑)여순사건 특별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더불어민주당 전남 동부권 소병철(순천광양곡성구례갑서동용(순천광양곡성구례을김회재(여수을주철현(여수갑김승남(고흥군보성군장흥군강진)의원이 공동으로 법안을 준비했다.

유족들과 시민들은 특별법제정안이 지난 22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법안심사 소위원회를 통과한 사실을 환영하며 5월 국회 본회의 통과를 기대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지역 역사에 전문 식견을 갖춘 김충석 민선 35기 여수시장이 법안 통과에 참고할만한 글을 기고해 게재한다.

 

<기고>

위 자료는 202133일 국회 행안위에서 1차 심의하고, 9일에 2차 심의하여 본 회의에 상정해서 통과시킨다는 의사일정을 전해 듣고, 여순사건 특별법()의 문제점을 적시하여, 평소에 잘 아는 국회의원님들에게 Email로 보내며, 기왕 73년이나 지났으니 완벽하게 법안을 수정하여 통과시키도록 부탁드렸고 38일에는 시간이 없어, 의원 몇 분에게 줄여서 카톡으로 보낸 자료인데, 9일 심의부터 유보된 내용이니 앞으로 바르게 입법되도록 함께 노력합시다.

 

여수순천 10·19사건(약칭 여순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안에 대한 小考

민선 3·5기 여수시장 김 충 석

 

민선 3·5기 여수시장 김충석

21대 국회에서 순천이 지역구인 소병철 국회의원을 비롯하여 152인이 발의한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안 중에

사건의 성격과 기간, 피해자 범위에 대하여 소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건 당시 초도국민학교 3학년으로 일부분 목격하고, 5학년 때 6·25사변이 일어났고, 여수에서 중고등학교 재학 중일 때, 사건 현장에 계셨던 분들과 목격자들의 말씀을 많이 듣고 자란 뒤에 사회활동을 하면서 꾸준히 연구 조사하여, 1994년 문정인 여수문화원장과 함께 여수청년회의소 특우회, 여수지역발전협의회, 여수로타리클럽 회장으로 여수순천반란사건, 약칭 여순반란사건이란 명칭은 여수 순천시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처럼, 오랫동안 선의의 피해를 당해 온 잘못된 명칭입니다.

사건 발발 당시에 불렸던 여수주둔 14연대 반란사건으로 명칭을 변경해 줄 것을 정부에 건의하였으나, 국군 14연대 반란이라 할 수 없으니, 여수 순천 10·20사건, 약칭 여순사건이라 명칭을 변경해주겠다는 정부의 고충을 이해하면서도, 반란 시작일은 1019일이라고 설명하여, 여수 순천 10·19사건, 약칭 여순사건으로 명칭을 변경해주어 감사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사건 발발 50주년을 앞둘 때부터 사건의 진상규명과 피해 상황 등을 정확하고 공정하게 조사하여, 반란군과 좌익들에게 희생당한 군인, 경찰, 지역 유지와 진압과정에서 아무 잘못이 없는데 군경에게 억울하게 희생된 민간인들의 명예회복과 추모사업을 추진해왔는데, 사건 당시 태어나지도 않은 일부 인사들이 사실을 왜곡하여 14연대 봉기! 여수시민 항쟁! 여순항쟁! 이라고 떠드는 것을 보고 듣노라면 기가 막히고 안타깝기 그지없어. 2018년 여순사건 70주년 그때를 되돌아본다! 단행본(30)으로 1천 부 만들어 국회의원들을 비롯한 각급 기관 단체에 배부하면서 여순사건특별법 제정운동을 해 왔습니다.

법이란 만들 때 잘 만들어야지 잘 못 만들면 여러 가지로 또 다른 폐해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너무 늦었지만 잘 살펴서 국민 누구나 다 공감하고 따를 수 있는 여순사건 특별법을 만들어 주시기를 간곡히 당부드립니다.

 

1, 위 법 제안이유 첫째 줄

여수에서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14연대 일부 군인들이 국가의 제주 4·3사건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사건임. 이로 인한 혼란과 무력 충돌 및 진압 과정에서 다수의 무고한 민간인들이 희생당하고 피해를 입었음.

말미 전략- 이에 민간인 희생사건에 관한 다수의 특별법과 같이 이하 생략

 

사건의 성격과 희생자의 범위에 대하여

14연대 인사계 지창수와 좌익 하사관들이 일으킨 반란사건 임

단기 4281(서기 1948) 1019일 여수 신월리에 주둔하던 14연대 인사계 주임 지창수와 그를 따르는 좌익계 하사관들이 2개월 전에 UN 총회의 결의로 탄생한 대한민국 정부에서 14연대 1대대의 제주 출동명령에 불복하고, 1개월 전에 수립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지하면서, 1대대가 제주로 출동하기 1시간 전에 무기고를 점령함과 동시에, 잠시 쉬고 있던 장교들을 불문곡직 무참히 사살하고 비상 나팔을 불어 연병장에 집합한 사병들에게 무장한 좌익 하사관들이 둘러싼 뒤에 지창수 상사가 단위에 올라 긴급 정보에 의하면 여수경찰이 평소 우리와의 충돌에 반감을 품고, 전 일본 해군을 동원하여 여수에 상륙하여 우리 연대를 포위 공격하려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제주도 출병에 앞서 이들 악질 반동 경찰과 일본군을 타도해야 한다.

나아가서 우리는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에 반대한다. 우리는 남북통일의 정부를 진정으로 원한다. 지금 북조선의 인민군도 남조선의 해방과 일본군을 격퇴하고자 38선을 넘어 남진하고 있다. 우리도 이젠 인민해방군으로써 악질 반동 경찰을 쳐부수고 북상하는 인민군대로서 지금부터 행동을 한다. 모두 나와 뒤를 따르라!”고 허위사실을 유포하며 선동하는 지창수 상사에게 ! 지창수 너 빨갱이구나!” 하는 군기대(헌병) 하사관들을 쏴 죽여 연대를 장악하고 살육과 공포 분위기 속에서 총과 실탄을 지급하고 시내로 출동하여 군경 저지선을 뚫고 여수경찰서를 점령하고 불태우며 경찰들을 사살하고 20일 새벽 5시경 시내 주요기관을 점령하고 인공기를 내걸었다.

김지회 중위가 시내에서 합류하여 2개 대대를 지휘하여 기차로 순천으로 가서 철도경비를 하고 있던 홍순석 중위1개 대대씩 나누어 지휘하고, 지창수 상사가 지휘하는 1개 대대는 여수에 남아 여수읍사무소(1년후 여수시청)에 인민위원회를 설치하고 시내에 제주도 출동거부병사위원회 성명서, 여수인민에게 고함, 여수인민위원회 성명서, 인민대회를 알리는 벽보와 미군 철수, 토지는 농민에게라는 벽보와 구호도 나붙었다.

오후 3시경에 백두회관이란 요정이 몇 달 전에 불타버린 빈터에 임시로 연단과 국기게양대를 만들고 여수의 좌익대표들이 모두 나왔고 1,000여 명의 주민들이 모여 연장자인 이창수의 사회로 박수가 터져 나온 가운데, 추도가 해방의 노래를 시작으로 인민공화국기가 서서히 올라가 펄럭이는 가운데 인민대회가 시작되었다.

남로당 여수위원장 이용기의 개식사에 이어 유목윤이 지난밤부터 여수에는 인민해방군이 상륙하여와서 우리를 해방시키고, 순천으로 북상하여 이를 점령하고 북으로 북상 중에 있다. 또한 이북의 인민군대가 38선을 돌파하여 서울을 점령하고 남진 중에 있으며 남조선의 해방은 목전에 도달하고 있다. 이북의 인민군대가 38선을 돌파하였기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도 오늘 아침에 일본으로 도망쳤다. 따라서 우리 인민은 총궐기하여 남조선을 완전히 해방시키는데 앞장서야 한다.”라고 거짓 선동을 했다.

세 번째로 등단한 인물은 14연대 인사계 지창수 상사였다. 그는 군중들의 열띤 환호 속에 손을 흔들며 여유있는 모습으로 등단해 능란한 말솜씨로 장내를 사로잡았다. “친애하는 여수 인민 여러분! 저는 14연대 인민해방군사령관 지창수입니다. 어젯밤 우리는 미리 북조선 인민군과 짜놓은 계획대로 동족상잔의 제주파병을 거부하고, 우리 인민의 적인 경찰을 쳐부수고 여수 인민을 해방시켰습니다. 또 우리는 북조선 인민군과 약속대로 합류하기 위해, 오늘 아침 김지회 동무가 2개 대대 병력을 이끌고 이미 순천으로 떠났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순간 국내에 있는 국방군 동무들도 우리와 호응하기 위해 일제히 일어났습니다. 이승만도 이 기미를 알아차리고 이미 일본으로 도망가고 없습니다. 여수 인민 여러분! 이제 앞으로 우리 인민해방군은 통일의 첫걸음이 되는 군사작전에만 힘쓰고 후방의 혁명과업은 인민위원회와 보안서가 맡아서 잘 처리해 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혁명과업을 잘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승만 일당의 주구 노릇을 하던 경찰과 친일파, 모리간상배 등 반동분자들을 철저히 뿌리 뽑아야 합니다.

그리고 존경하는 여수 인민 여러분! 앞으로 이 여수 땅은 우리 14연대 인민해방군이 조국 통일의 첫 북을 울린 영광스런 땅으로서 영원히 역사에 빛날 것입니다.” 지창수의 연설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계속되었다. - 이하 생략 이날부터 여수는 반란군과 좌익들이 판을 치고 반역자 색출과 인민재판이 계속되면서 피바람이 불어닥쳤다.


따라서 14연대 봉기라던지 여수시민항쟁이나 여순항쟁이란 어불성설이다.

 

2,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2(정의)

1, “여수·순천 10·19사건이란 정부 수립의 초기 단계에 여수에서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14연대 일부 군인들이 국가의 제주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사건으로, 19491019일부터 지리산 입산 금지가 해제된 195541일까지 여수·순천지역을 비롯하여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 및 경상북도 대구광역시 일부 지역에서 발생한 혼란과 무력 충돌 및 이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에 대하여는

여수·순천 10·19사건이란 정부 수립의 초기 단계에 여수 신월리에 주둔하던 국방군(당시는 국방경비대, 국방군으로 불렸다) 14연대 인사계 지창수 상사의 지시로 좌익 사병들이 국가의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사건으로, 19481019일부터 여수·순천지역 반란군을 진압하는 과정과 19494월까지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 등 지리산 지역에 출몰한 빨치산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희생된 군경과 지역 유지와, 공비토벌과정에서 지리산 지역 마을들에 다수의 민간인이 공비를 도왔다고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로 수정하여야 함.

그 이유는 14연대 지창수 상사를 비롯한 좌익계 하사관들을 제외하고는 사병들은 출동을 앞두고 긴장하며 대기하고 있었는데, 출동시간보다 1시간 빠르게 비상 나팔 소리와 동시에 총소리가 울려 퍼지고 연병장에 집합하라는 명령에 따라 연병장에 도열하기 바쁘게 하사관들이 무장하고 주위를 포위하고 허위사실을 유포하며 군기대(헌병) 하사관들을 살해한 것을 목격한 사병들은 군대의 특성상 어쩔 수 없이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으나, 22일부터 L-4 연락기에서 반란군은 지도자를 사살하고 부대에 백기를 달고 투항하거나, 그렇지 못 할 경우에는 집단 혹은 개인적으로라도 총기, 탄약, 화약을 파괴하고 귀순하라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이범석 명의로 된 삐라를 여수와 순천에 뿌렸다.

이것을 받아본 여수와 순천주민들은 안심하면서 조심하고, 14연대 반란군과 남로당원들은 거짓말에 속았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당황하였다.

21일 순천에서부터 진압작전이 시작되자 14연대 병사들이 귀순하기 시작하였고, 김지회와 홍순석이 이끄는 병력은 백운산이나 지리산으로 도망치고, 24일 여수탈환작전이 시작된 뒤에 여수에 있던 지창수와 병사들도 육로로 도망을 치기 시작하여 지리산으로 들어가 산악지대를 이용하여 빨치산 활동을 시작하였다. 26일 여수에는 부화뇌동하던 인민위원들과 추종자 300여 명밖에 남지 않아 소탕되고 여수까지 탈환하였다.

 

피해자들을 19491019일부터 195541일까지 특정한 기간과 지역에 대하여

정부에서는 순천과 여수가 탈환되자 지리산을 포위하고 공비토벌작전을 시작하였는데, 14연대 병사들은 매서운 추위에 잘 곳도, 먹을 것도 없고, 반란군이 되었다는 사실에 공포가 엄습해오자 보초를 서다가 도망치고, 보급투쟁을 나왔을 때 도피하거나 자수한 병사들이 늘어가고 토벌대의 공격으로 많이 죽어갔다.

(해방과 동시에 중국, 만주, 일본에서 동포들이 귀국하고, 소련의 군정과 인민재판으로 피해를 당한 북한 사람들이 월남하였고, 당시 우리나라 국민들은 신분증이 없었다.)

14연대 반란을 일으킨 인사계 지창수 상사19491월 중순 경남 하동군 칠불암 뒷산에서 매복중인 토벌대에 생포되어 6·25사변이 일어나자 총살되었고

김지회 중위와 홍순석 중위194949일 뱀사골에서 토벌대의 공격을 받고 홍순석은 사살되고, 김지회는 총탄을 맞고 도망쳤으나 며칠 뒤에 시신으로 발견되어 반란 6개월 만에 14연대 반란군들은 지리산에서 괴멸되었다.

 

지리산에 빨치산이 다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19506·25사변이 일어나서 사흘 만에 서울을 내주고, 밀리고 또 밀려 국군과 UN군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사력을 다해 방어하고, 인민군들은 총공격을 퍼붓고 있던 915일 맥아더 원수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미해병대와 한국해병대는 경인가도를 거쳐 서울탈환작전에 나서고, 국군 7사단 병력은 남진하여 인민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국군과 UN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박차고 총공격으로 나서자, 인민군의 주력은 산악을 타고 북으로 도망갔으나 1만여 병력이 지리산을 비롯하여 주변의 여러 산으로 들어가서 유격전을 펼쳤다.

정부에서는 군경으로 토벌대를 조직하여 압박해 가다가 53727일 휴전이 성립되자, 전방에 있던 육군 사단을 후방으로 이동하여 토벌에 나서 19553월에 공비(남부군 사령관 이현상)를 완전히 소탕하여 치안이 유지되었다.

따라서 여순사건은 19481019일 발생하여 19494월까지로 해야한다.

낙동강 전선에서 총공격에 나섰던 인민군들은 19509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과 국군과 UN군의 총반격으로 퇴로를 차단당하여 지리산에 입산하여 활동하였으나, 완전히 토벌된 19553월까지는 인민군과 남로당원들이므로 시기를 확실히 구분하여야 한다.

 

2021.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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