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이웃이 되어 준다면
누군가 이웃이 되어 준다면
  • 심재민
  • 승인 2020.11.18 18: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심재민 어학원 원장

 원서 읽기는 외국어 마스터의 지름길이다. 게다가 같은 작가의 책을 계속 읽으면 효과가 더 크다. 요즘 내가 잡고 있는 책들은 미국 작가 Kristine Hannah의 작품들이다. 엊그제 읽은 책은 알래스카를 배경으로 한 The Great Alone이다.

이 소설의 큰 줄기는 두 가지이다. 먼저는 베트남 전쟁 참전 이후,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아버지이고, 또 하나는 알래스카라고 하는 혹독한 환경 속에서 서로를 돕는 이웃들이다.

The Nightingale에서도 1차 대전 이후, 변해버린 아버지와의 갈등이 등장한다. 공교롭게도, The Nightingale보다 더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Delia Owens가 쓴 소설 Where The Crawdads Sing의 주요 주제도 전쟁에서 돌아온 아버지의 폭력이었다.

전쟁은 잔인한 현실의 대명사이다. 경쟁과 생존을 강요하는 현실은 반드시 전쟁이 아니라 하더라도 아버지들에게 정신적 신체적으로 버거운 짐을 지운다. 우리나라 소설들 중에도 이러한 소재를 다룬 작품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만큼 가정을 지켜야 할 아버지라는 존재가 오히려 파괴적인 공포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음을 알게 한다.

The Great Alone의 두 번째 주제인 이웃은 내가 보기에 진정 작가가 이 책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주제인 아버지의 폭력은 알래스카의 살기 힘든 자연환경과 함께 이웃들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도구로 설정된 것 같다.

기괴한 생각으로 아무런 준비 없이 알래스카로 이주한 주인공 가족을 위해, 이웃들은 아무런 대가없이 나무를 베고, 가축우리와 저장고를 만드느라 하루 종일 수고한다. 다음날 해가 뜨자, 그들은 다시 나타나서 자기 집인 양, 다시 일을 시작한다. 알래스카의 겨울은 살인적이라고 가르쳐 주며, 주인공 가족을 대비시킨다. 알래스카의 겨울보다 더 공포스러운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주인공과 그의 어머니를 지켜준 것도 이웃이었다. 자기 가족, 동생, 딸의 일처럼, 관여하고 보호막이 되어준다.

우여곡절 끝에 알래스카를 떠나 숨어살던 주인공은 소설 말미에 다시금 알래스카를 찾는다. 그는 알래스카를 고향이라고 부른다. 친족 하나 없는 곳이지만, 자기 일처럼 기꺼이 도움과 사랑을 준 그들이 있는 곳으로 주인공이 돌아감으로써 작품은 마무리된다.

인생에는 괴물 같은 아버지, 살인적인 알래스카의 겨울 같은 위험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에게 찾아온다. IMF사태, 코로나확산은 모두가 겪는 고통일 뿐, 그것들이 없던 시간 속에서도,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우리는 끊임없이 어려움에 봉착했다.

인생의 수많은 어려움들은 개인이 각 가정이 홀로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누군들 자신 있게 홀로 감당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지난번 책 감상에서 덴마크의 복지환경을 소개해 드린 적이 있다. 덴마크 복지의 핵심은 겉으로 보이는 정책들이 아니라, 이웃을 아끼는 철학이었다. 그러한 철학은 시대와 환경이 바뀌면, 그에 알맞은 정책을 만들어 내는 원동력이 된다.

인터넷 책 광고들에서 남에게 뒤처져 있는 초조함’ ‘경쟁 속에서 생존이라는 말들을 찾기란 그렇게 어렵지 않다. 각종 시험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유명한 내가 졸고 있을 때, 상대의 책장은 넘어간다라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는 살아남는 소수가 되기 위해, 매일을 전쟁처럼 살고 있다.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은 경쟁자이며 그들보다 앞서야 만이 내가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나, 진정 그러한가? 아니면, 그럴 것이라고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가상인가? 현실로 드러난 덴마크의 경우나, 소설로 형상화된 알래스카의 예는 우리에게 그렇지 않다고 역설한다.

우리 스스로에게도 그런 실례가 있다. 최근 몇 십 년 전까지, 보릿고개로 하루 세 끼 먹는 것이 가장 큰 걱정거리인 시대가 있었다. 그럴 때에도 우리는 집에 찾아온 사람이 끼니를 걸렀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항상 식사를 권했다. 우리 식구 먹을 것도 부족하지만, 굶는 이웃을 그냥 보내지 않았던 것이 우리 민족이다.

언어에도 그런 흔적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나의 소유된 집을 우리는 우리집이라고 한다. 나를 낳아준 어머니를 우리는 우리엄마라고 한다. 영어로 직역하면 ‘Our’인데, 이는 공동소유를 의미한다. ‘우리엄마는 그분이 우리 모두를 낳아주셨다는 말이다. 실제로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우리의 혀는, 우리의 말은 아직도 이웃을 돌아보았던 옛 우리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혼자서는 질 수 없는 인생의 무거운 짐도 이웃이 거들어 주면 거뜬히 짊어질 수 있다. 그 도움을 위해, 평생을 성인군자처럼 희생할 필요는 없다. 하루 이틀 시간을 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이웃을 내 가족처럼 생각해 줄 때, 그 마음이 전달될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들이 모여, 내가 힘들어 쓰러져 있을 때, 나를 일으켜 세우는 따뜻한 손들로 되돌아 올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