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특별법 기획] 여순사건 그때를 되돌아본다(16)
[여순사건특별법 기획] 여순사건 그때를 되돌아본다(16)
  • 김충석
  • 승인 2020.09.07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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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선3기, 5기 여수시장

 17, 여순사건으로 인맥이 끊어진 여수!

여순사건과 뒤이어 터진 6·25 한국전쟁으로 좌우익으로 갈려,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어 인맥이 끊어졌다. 1950년대부터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어른들이 모이면 똑똑한 사람들은 반란사건으로 다 죽고, 저런 것들이 나서서 유지라고 설쳐 대니 한심스럽고 안타깝다.’라고 하였다.

18, 여순반란사건-여수순천1019사건, 약칭 여순사건으로 변경

향토사학가 김계유 선생은 1987여수순천반란사란 책을 펴내면서 처음으로 여순반란사건‘14연대반란사건으로 명칭을 변경해야 한다고 했고, KBSMBC에 출연하여 명칭 변경의 당위성을 제기하였다.

1992년부터 여수문화원 문정인 원장과 여수청년회의소가 함께 명칭 변경운동을 하였고, 그해 1220일 신순범 국회의원이 대정부질문을 하여 관계부처와 협의하여 여수주둔군 반란사건으로 명칭이 변경되도록 적극 노력 하겠다.’는 답변을 얻어냈다.

1994년에 여수문화원, 여수청년회의소, 여수로타리클럽, 여수지역발전협의회가 힘을 합쳐 여순반란사건을 14연대 반란사건으로 명칭 변경 운동을 다시 시작하였다. 그러나 국방부에서 반대하여 교육부에서 여수 순천 10·20 사건으로 변경한다고 하였으나, 실제로 사건이 터진 날은 1019일이라고 주장하여, 최종적으로 여수 순천 10·19 사건,’ 약칭 여순사건으로 정부에서 확정해주었다. 늦게나마 여수와 순천사람들의 명예와 자존심을 회복하였다.

1995년 여수여천지역사회연구소를 만들면서 필자는 초대회장으로 여러 가지 현안 외에 여순사건을 재조명하고 용서와 화해를 통하여 위령탑도 만들고, 미래로 나가는 중장기 발전계획을 세워 실천하기로확정하고 추진하였다.

1997. 9. 3. 19:00 여수지역발전협의회장으로 현대웨딩프라자 3층 홀에서 구국의 성지 전라좌수영 여수! 왜 삼여통합을 해야 하는가?’란 소책자(속표지에 여순사건과 위령탑 모형)를 나눠주면서, 여수시장과 시의회의장, 여천시장과 시의회 의장, 여천군수와 군의회 의장과 시·군의원들을 비롯하여 여수여천지역 주요기관장과 시민사회단체 대표들, 국제봉사단체 대표들과 주요언론기관, 재경여수향우회 회장단 등 200여 명을 자비로 초청하여, “그동안 정부 주도로 실시한 통합에 여수는 세 번이나 실패하였지만, 불씨를 되살려 전국 최초로 주민발의에 의한 삼여통합 투표일이 99일로 다가오는데 마지막 기회입니다. 한 지붕 세 가족이 다시 하나로 뭉쳐 2010년 여수세계박람회도 유치하여 세계적인 도시로 만들고, 50년 전 해방공간에서 좌익이 뭔지, 우익이 뭔지도 모르면서, 대한민국 정부수립 두 달 만에 터진 14연대 반란사건으로, 수많은 사람들과 인재들이 너무나 억울하게 희생되어 여수에 인물이 없다고 탄식합니다.

내년 199810월이면 여순사건 50주년이 됩니다. 당시 영내에서 사병들에게 영문도 모르고 사살되거나 찔려 죽은 25명의 장교와 3명의 하사관, 새 나라 국방의 간성이 되겠다고 자원입대한 사병들이, 상명하복이란 군대의 특수성과 좌익군인들의 총칼 앞에 어쩔 수 없이 반란군이 되어 희생된 수 많은 사병들, 반란군을 막고 경찰서를 지키다가 전사하거나 길거리에서 참변을 당한 72명의 경찰관들과, 억울하게 참변을 당한 16명의 우익인사들에 대한 명예도 되살리고, 진압과정에서 희생된 군경과 유지들, 아무 죄도 없이 억울하게 좌익으로 몰려 희생된 사람들과, 재판을 받고 복역 중에 6.25사변이 터져 후퇴하면서 처형당한 사람들의 명예도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서로 용서하고 화해해서 여수시민으로 하나가 되어, 흰색 초롱불 도자기 등잔모형으로 합동위령탑도 만들고 미래로 나아갑시다.” 하였더니, 만장의 박수를 받았다.

다음날부터 여수시의회와 시민사회단체, 국제봉사단체들이 행사를 계속 이어나가고, 여천시와 여천군 쪽에서도 지성인들이 적극 협조하여, 99일 천신만고 끝에 삼여통합이 성사되어, 199841일 전남 제1의 여수시가 탄생 되었다.

2002년 민선 3기 여수시장에 당선되어, 여러 가지 현안을 해결하면서도 2008년 여순사건 60주년에 대비하여 여수시와 여수지역사회연구소가 준비하고, 김충조 국회의원은 여순사건특별법을 국회에서 추진하고 있었으나, 노무현 대통령 탄핵 후폭풍으로 낙선하고, 필자도 공천을 못 받아 출마를 못 하여 지나치고 말았다.

2010년 뜻밖에 무소속으로 민선 5기 여수시장에 당선되어, 이대로 개최했다간 국가적 망신이라고 감사원에서 지적한 2012 여수세계박람회를 성공 개최하고, 여러 가지 현안을 해결해 나가면서도 여순사건 70주년 기념사업도 준비하고 있었으나, 더 이상 일 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계속~>

[여수인터넷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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