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잊지 말자! 6‧25사변〜6‧25동란〜한국전쟁
[칼럼] 잊지 말자! 6‧25사변〜6‧25동란〜한국전쟁
  • 김충석
  • 승인 2020.07.13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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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잊지 말자! 625사변625동란한국전쟁

북한군이 불법 남침하여 3년여 1,129일간 전쟁

                              민선 3·5기 여수시장 김 충 석

 

 

 단기 4283(서기 1950), 필자는 초도국민학교 5학년이었는데. 세월이 흘러 81세가 되었다. 더 늦기 전에 70년 전의 불행한 비극적 전쟁을 되돌아보면서 이런 비극이 이 땅에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간절한 염원으로 이 글을 쓴다.

폭풍전야의 한반도에서는

1949629일 주한미군이 완전히 철수하였다. 919일 소련 정부도 북조선에 주둔하는 소련군 철수계획을 발표하였다.

주한 미군이 철수할 무렵 38선을 경계로 남북한 간에는 자주 충돌이 일어났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로 날아가 스탈린을 만나 남조선을 적화시키겠으니, 중공의 마오쪄둥(毛澤東1893-1976)과 함께 지원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스탈린은 미군이 두려워 반대하였으나, 남조선으로 쳐들어가면 남로당원들이 전국에서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미군이 다시 들어오기 전에 남조선을 적화통일하겠다고 간청하여, T-34 탱크 242대와 전차, 야포와 170여 대의 전투기를 포함하여 200대의 비행기와, 군함을 비롯하여 각종 최신무기와 군수물자를 지원하면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한국계 소련인(카레이스키) 5천 명을 보내 전차부대에 배치시키고, 소련군 군사고문단을 평양에 남겨두어 작전을 총괄 지휘하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하였다.

막강했던 장체스(장개석)의 국민당 정권을 대만으로 밀어내고, 1949101일 중국을 통일한 마오쩌둥(모택동), 조선족 출신으로 구성된 김창덕의 164단을 인민군 5사단으로, 방호산의 166사단을 인민군 6사단으로 이름을 고쳐 보내고, 김무정, 이권무, 김웅 등 사단장급 지휘관과 3만 명의 중공군을 통째로 김일성에게 넘겨주면서, 미군이 도착하기 전에 남조선을 적화통일하라고 지원하였다.

반면 대한민국 국군은 탱크와 전투기는 전혀 없었고, 학생들을 포함한 국민 성금으로 캐나다에서 수입한 20여 대의 훈련용 연습기와 L-4 연락기와 미군이일본군을 무장해제(武裝解除)하여 보관해두었다 넘겨준 낡은 무기가 전부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소련과 중공으로부터 최신무기와 병력을 지원받은 김일성의인민군전력(人民軍戰力)을 자세히 알리며, 미국에 탱크와 무기를 지원해달라고 했지만, 그동안에도 38선에서 소규모전투가 가끔 벌어지고 있었는데, 만약 지원해줄 경우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이 각하의 명령만 떨어지면 아침은 개성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라는 등 허무맹랑한 말처럼 사고를 칠 가 봐, ‘한국은 산악지대라 탱크가 필요 없다.’라고 거절하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50110일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은 소위 애치슨 라인이란 것을 발표하였는데 한국은 미국의 방위선 밖에 있어, 소련의 스탈린, 중공의 마오쪄둥과 김일성은 적화통일의 기회가 왔다.’ 생각하고 서둘렀다.

청산리전투의 영웅 철기 이범석 장군은 대한민국 초대 국방부장관과 국무총리 로 기반을 다지면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는데, 민족청년단을 운영하는 등 야심이 많다고, 1949321일 국방부장관 후임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의 상선이나 군함을 수없이 침몰시키는 공포의 독일 U보트(잠수함)를 교묘히 잘 피하면서 항상 안전하게 임무를 수행하자, 영국 해군에서 그 항로를 Shin Line이라고 극찬했던 영국 상선의 신성모 선장을 1950년 이승만 대통령이 귀국시켜 국방부장관을 시키고, 421일에는 국무총리까지 겸하게 하였으나, 6.25가 터진 뒤에 만약 이범석 장군이 그대로 계셨더라면, 김일성이 쳐들어 왔을 때 그렇게 처참하게 당하지만 안 했을 것이라고 못내 아쉬워하는 분위기였다.

평화공세에 속아 넘어가서, 누란의 위기를 자초!

1950년 봄이 되면서, 38선을 넘어 귀순한 장병들과 그동안 여러 경로를 통하여, 김일성이 소련과 중공의 도움을 받아 남조선 적화통일준비를 완전히 끝내고 곧 남침할 것이란 정보를 알고, 국군은 5월부터 비상경계령에 들어갔다.

그런데 북한은 방송을 통하여, 평양 고려호텔에 연금되어 있는 조만식 선생과 남한의 형무소에 갇혀있는 이주하, 김상룡과 38선 경계선에 위치한 토성역(土城驛)에서 맞 교환하자!’라며 날마다 평화공세를 계속하였다.

육군은 6월 들어 사단장급 인사이동과 부대 간 이동을 단행하여 지휘관들이 부대 장악을 못 하고 있었는데, 정부에서 북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하면서 평화무드가 조성되어, 육군은 1950624일 토요일 0시를 기하여 그동안 유지해오던 비상경계령을 해제하면서, 농촌에 보리 베고 모내기를 도우라며 사병들에게 2주간 특별휴가를 주었고, 주말이 겹쳐 부대 병력의 거의 절반이 외출, 외박한 상태였다. 더구나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을 비롯한 육군의 고위 간부들은 24(토요일) 저녁 6시에 시작한 장교구락부(육군회관) 낙성식 파티로 술에 취해, 전쟁이 난 날 새벽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김일성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625일 일요일 새벽 4, ‘폭풍이란 공격명령과 함께, 황해도 옹진반도부터, 경기도 개성, 전곡, 포천, 강원도 춘천, 양양 등 4개 축선 11개 지점에 이르는 38도선 전역에서 불법 남침을 개시하였다.

무방비 상태로 잠을 자던 국군장병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하면서 폭약을 들고 탱크 밑으로 들어가서 자폭하는 등 사력을 다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610일 춘천에 주둔하고 있던 6사단장으로 부임한 김종오 대령은, 유일하게 육본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병력을 유지하고 있다가, 새벽에 기습하는 인민군들을 맞아 용감하게 싸워 3일 동안 전선을 잘 지켰으나, 좌우익의 국군들이 모두 후퇴하여 역포위당할 위험에 빠지자 눈물을 머금고 후퇴하였으니, 유비무환(有備無患)이 얼마나 소중하고, 공격보다 방어가 더 용이(容易) 한 가를 실증하는 귀중한 사례였다.

채병덕 총장은 후방의 병력으로 방어선을 구축하여 대비하지 않고, 무모하게 병력이 도착하는 대로 전장에 축차투입(逐次投入)하여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고 없이 한강철교를 끊고 개전 사흘 만에 서울을 내주고, 영등포에 김석원 장군이 지휘하는 한강방어선을 구축하면서 정부는 대전으로 천도하는 비극을 맞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장면(張勉) 주미대사에게 헤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과 UN에 알려 도움을 받도록지시하며, UN 한국위원회와 긴급회의를 열도록 하였다.

UN 한국위원회는 북한 측에 즉시 전쟁 중지와, 평화회담을 통해 사태를 해결하라.” 고 방송하면서 UN 안보리에 보고하고 일본 도쿄(東京)로 이전하였다.

UN 안보리에서는 즉시 특별회의를 개최하여 한반도에서 전투중지와 북한군의 38도선 철수 결정과 미국이 요구한 정전요구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38선 이남 지역에 국한된 미국 육 해군 공군작전을 승인하고, 맥아더 원수를 한국작전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일본에 있던 연합국최고사령부 (SCAP) 맥아더 원수는 29일 이승만 대통령과 한강방어선을 시찰하고, 미군의 작전지역을 38선 이북 전 지역으로 확대하고 한국에 무기를 긴급 공수하였다.

75UNUN군 결성, 맥아더 원수를 UN군 사령관으로 임명

개전 3일 만에 주력군이 소멸된 국군은 계속 밀렸고, 75일 경기도 오산에서 미 육군 스미스 기동부대가 참패하자 미국의 조야가 깜짝 놀랐다. 24사단도 719일 저녁 대전에서 후퇴하면서 많은 장병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고, 사단장 딘 소장마저 실종되는 등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군산지역 방어선에서 여수 신항에 도착한 한국해병대에 처음으로 M1 소총을 주었으나, 육군 주력이 소멸되어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인민군 주력은 경상도로 향하였고, 국군과 UN군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인민군과 혈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915일 모두가 불가능이라 했던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여 전세가 뒤 짚어지자 낙동강 강을 넘어 북진하기 시작하였.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고 있는 맥아더 원수/ 평양에서 수복연설하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

                           휴전회담(休戰會談)

8·15까지 남조선을 해방시키겠다.”던 김일성의 꿈은 미군의 참전으로 낙동강 전선에서 피아간에 엄청난 사상자와 피해를 내면서 물거품이 되었다.

915일 맥아더 원수의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928일에는 서울을 탈환하고 밀고 올라갈 때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달빛 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 화랑 담배 연기 속에 살아진 전우야 우거진 수풀을 헤치면서 앞으로, 앞으로, 추풍령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여 피에 맺힌 적구를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떨어져 간 전우여 잘 자라 터지는 폭탄을 무릅쓰고 앞으로, 앞으로, 우리들의 가는 길에 삼팔선 무너진다, 흙이 묻은 철갑모를 손으로 어루만지니 떠 오른다, 너 얼굴이 꽃같이 별같이,’ 전우가(戰友歌)를 목이 터져라 부르면서, 밤낮 가리지 않고 밀고 올라가는데 UN에서는 38선에서 정지하라 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북진을 명령하여 101일 국군 3사단과 수도사단이 38선을 돌파하자(국군의 날로 제정) 미군도 뒤따랐다.

1019일 평양 출신 백선엽 장군의 국군 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이 평양을 점령하고, 10군단은 원산에 상륙하여, 국군과 UN군은 초산과 해산진까지 밀고 올라가서 통일을 눈앞에 두었으나, 중공의 마오쪄둥(모택동)은 그전에 김일성, 스탈린과 약속한 데로 순망치한(脣亡齒寒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다)과 항미원조(抗美援朝 미국과 싸워 조선을 구한다)라는 명분을 내세워, 극비리에 1차로 4개군 12개 보병사단과 3개 포병사단 26만여 명의 중공군을 참전시켰다.

1016일부터 밤에만 압록강을 건너 산맥을 타고 낮에는 잠복하여 미군의 정찰기를 속이고 밤에만 계속 이동하면서 아군의 후방에 깊숙이 내려와서 매복한 중공군은 113일 새벽부터 깊은 잠에 빠져있던 국군과 UN군들에게 징을 치고 피리를 불면서 산에서 쳐들어 내려오는데, 죽여도 또 죽여도 인해전술(人海戰術)로 계속해서 밀고 내려왔다. 그해 따라 맹추위가 겹쳤는데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 보급선도 길어지고 겨울 준비가 덜 된 국군과 UN군은 후퇴를 거듭하면서 서울을 다시 내주고 평택까지 후퇴하였는데 이때를 1·4후퇴라 한다.

맥아더 원수는 만주에 원자폭탄을 던져야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건의하였으나, 트루먼 대통령은 반대하고 411일 맥아더 원수를 해임하고, 8군사령관 겸 UN군 사령관에 리치웨이 대장을 후임으로 임명하였다. 국군과 UN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1951315일 서울을 다시 수복하였고, 4월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를 무찌르고 북진을 계속하여 38선을 다시 넘어 올라가던 1951710, 1주일이면 끝날 줄 알고, 개성 래봉장에서 휴전회담을 시작하여 UN 측은 현 전선에서 휴전하자고 제안했으나, 한가지 합의해주면 공산 측이 또 다른 안을 들고나오는 바람에 25개월이나 걸리면서, 지루한 휴전회담 중에도 고지쟁탈전(高地爭奪戰)으로 피아간에 사상자는 날마다 엄청나게 늘어가고만 있었다.

적 후방에 침투하는 미군 낙하산부대 / 처음 휴전회담이 열렸던 개성 래봉장
판문점으로 옮겨 휴전회담을 계속함 /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에 서명하는 양측 대표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반대 반공포로석방과 한·미상호방위조약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을 치르느라 남북한 전 국토가 잿더미가 되었고 산업시설도 파괴되고 수백만이 죽고 다쳤는데 휴전이라니? 소련, 중공 북한 공산당은 숨을 돌리면 다시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면서, 주한미국 무초 대사를 통하여 미국이 무기만 대주면 우리가 싸울 것이니 UN군은 철수해도 좋다며, 휴전하려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먼저 체결하라.”고 요구하며, 휴전반대 데모를 전국적으로 확대하였다. 그래도 휴전 분위기가 무르익어가자,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으로 1953618일 밤부터 19일 새벽까지 거제도를 비롯한 8곳의 포로수용소에서 북한 및 남한 출신 반공포로 27천여 명을 석방시켰는데, 극소수만 미군 헌병들에게 다시 붙잡혀 수용되었으나,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였고 휴전회담도 멈추었다. 미국에서 로버트슨을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특사로 보내 외교적 절충이 시작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북한과 중공과 소련으로부터 공산 침략을 확실히 막아주고, 잿더미가 된 한국의 부흥을 위하여 특별한 원조를 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미국이 파격적으로 다 들어 주기로 하고, 1953727일 밤 10현재 양측 군인들이 대치한 곳에서 휴전이 성립되어, 각기 2km씩 물러나서 비무장지대를 설치하기로 하고 총성은 멎고, 포로 교환을 시작하였다.
8월에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이 내한하여 이승만 대통령과 일련의 회담을 통하여, ·미상호방위조약의 내용에 합의했고 그해 101일 조인하여, 19541118일 발효되어 세계최강의 미군이 주둔하여 자유대한을 지켜주고 있다.


3년간의 전쟁으로 남북한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산업시설과 공공시설, 주택들이 잿더미로 변했고 현재까지 밝혀진 인명 피해는 국군 62, UN16, 북조선 인민군 93, 중공군 100, 민간인 250, 이재민 370, 전쟁미망인 30, 전쟁고아 10, 이산가족 1,000만 등

당시 남북한 인구 3,000만 명의 절반을 넘는 1,900여만 명이 전쟁 피해를 입었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 침략을 받고도 적화되지 않고 자유민주주의를 지킨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휴전이 된 날 UN 한국통일부흥위원회는 평화적 방법으로 통일, 독립, 민주 대한민국을 달성하는데 가능한 온갖 지원을 준비하겠다.’라고 성명을 발표하였고,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한국구제기금 1회분으로 2억 달러 지출을 의회에 요청했고, 1948514일 북한이 전기 송전을 중단하여 남한 사회는 암흑천지가 되었지만, 미국에서 발전함을 부산에 드려와서 최소한의 전력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이후 지속적으로 무상원조를 통하여 한국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어, 산업화와 민주화를 앞당겨 한강의 기적을 만들면서 올림픽, 월드컵과 엑스포를 성공리에 치르고, 세계 10대 무역국으로 성장하면서 미국의 원조로 간신히 버텨 왔던 가장 가난했던 우리나라 대한민국만, 한강의 기적을 만들면서 유일하게 원조를 주는 나라로 세계 10위권 무역 대국으로 발전하였다.

소련도 모스크바방송을 통해서 북조선 정부에 대하여 통일과 부흥을 위한 노력을 보증한다고 보도하였다.

되돌아보면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임진·정유재란으로 조선 땅에 일본의 육군과 수군이 쳐들어 와서, 조선의 육군과 수군, 명나라의 육군과 수군이 연합하여 싸워 조선의 강토가 유린 된 뒤 360여 년 뒤에, 1950년부터 1953년 휴전이 될 때까지 한반도에서 남북한과 당시 세계의 독립국가 93개 나라 중에서 60개국이 대한민국에 병력이나 군수물자와 의료지원을 해주었고, 북한에는 소련이 각종 최신무기와 군수물자와 병력과 미그전투기와 조종사를 중공군으로 위장하여 참전시켰고, 중공은 엄청난 숫자의 지상군이 참전했고,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불가리아, 헝가리, 루마니아는 의료시설을 지원하고 동독과 몽골도 원조하여 9개국이 도와주었다.

6·25사변, 6·25동란이라 했는데 요즘은 6·25전쟁이라 부르고, 국제적으로는 처음부터 한국전쟁이라 불렀는데, 위에 적은 것처럼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이 한반도에서만 싸운 것도 최초이고 마지막이며, 사실상 제3차 세계대전이었다.

여수의 경우725일에 인민군이 무혈진주하여(삼산면만 제외하고 고흥 나로도 까지) 여순사건 이후 자취를 감췄던 좌익인사와 부역자들이 튀어나와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우익요원의 색출 및 가옥몰수 등에 나서는가 하면, 모든 관공서를 접수 운영하여 929일까지 67일간 적치하(敵治下)에서 유린 되었다.

여수내무서(여수경찰서)에 감금되어있던 우익 인사들과 손양원 목사, 윤형숙 전도사를 비롯한 기독교인들을 928일 서울이 수복된 것을 뒤늦게 알고, 밤에 후퇴하면서 미평의 산자락과 과수원으로 끌고 가서 모조리 사살하고 도망쳤다.

 

6.25 노래 박두진 작사 김동진 작곡

1, ! !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도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2, ! !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불의의 역도들을 멧 도적 오랑캐를

하늘의 힘을 빌어 모조리 쳐부수어, 흘려온 갚진 피의 원한을 풀으리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도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3, ! !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정의는 이기는 것 이기고야 마는 것

자유를 위하여서 싸우고 또 싸워, 다시는 이런 날이 오지 않게 하리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도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아! ! 대한민국

  - 한국회의법학회 2대 회장 충 석 (학회지 2019. 63쪽부터)

금수강산 삼천리! 오랜 역사 빛난 문화 이어온 겨레

어쩌다 총 한 방 못 쏴보고 나라 뺏기자, 의병으로

독립군으로, 광복군으로 싸우고 싸워서 세운 이 나라!

남북좌우로 동족상잔 3, 숱한 생령 죽고 다치고 이산가족 울부짖었네

학도병 국군 UN군들 초개처럼 사라지며 이 땅을 지켜 냈었지!

덕분에 2차 대전 후에 공산 침략받고도 살아남은 유일한 나라 대한!

! ! 자랑스러운 나의 조국!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여!

폐허 잿더미 속을, 허리띠 졸라매고 이고 지고 져 나르며 뛰고 또 뛰며

잘살아보세! 자식들 가르치고, 간호사 광부 하겠다고 서독으로 날아가고

연근해와 동중국해, 태평양과 대서양, 인도양을 휘저으며 고기를 잡고

방방곡곡,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며 밤낮 모르고 죽도록 일만 했었지

청구권자금, 월남전특수 종잣돈하고, 열사의 땅 중동에서도 피땀 흘리며

한강의 기적 일으켜서, 올림픽, 월드컵, 엑스포를 성공 개최한 나라!

원조받던 가장 가난했던 우리가, 원조 주는 부자나라로 만들었다오!

로마는 하루아침에 세워지지 않았고, 영원무궁한 나라는 세상에 없었나니

천하는 통일된 지 오래되면 분열되고, 분열된 지 오래되면 통일되는데

조선왕국 왜 망했나? 골육상쟁, 사색당파 싸움, 매관매직 부정부패~~

빛나는 대한민국 애써 세울 때, 요새 사람들 어디서 뭣들 하셨소?

나라 사랑 겨레 사랑 비전도 없이, 만나기만 하면 쌈질만 열심 또 열심~~~

천하의 한숨 소리 들리지도 않는가? 제발 유비무환일랑 잊지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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