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70주년, 그때를 되돌아본다! (4)
여순사건 70주년, 그때를 되돌아본다! (4)
  • 김충석
  • 승인 2018.12.02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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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선 3•5기 여수시장

12, 협력자 색출과정에 민간인들 학살과 시내 중심가에 방화를!

26일 저녁 8시경 잡혀있던 할머니 한 분이 저기 장 기(1952~53년 여수시장)씨 집에 불이 났다고 울먹여, 그 쪽을 보니 하늬바람을 타고 영단(전신전화국 자리)앞쪽이 불바다로 변해갔다. 자기 집이 타도 불을 끄러 갈 수 없었다. 오동환 소방서장이 불을 끄겠다고 했으나 ,군인들이 제지하고 김종원 대위가 구타하는 것을 봤다는 목격자도 있다. 27일 저녁 8시경에는 충무동 시민극장 근처에서 갑자기 불길이 치솟더니 때마침 불어 닥친 하늬바람을 타고 무섭게 번져나가 해안통에 쌓아둔 드럼통에 불이 붙어 하늘 높이 치솟아 터졌고 28일 오후까지 불에 탔다. 소방서에서 초기에 진압했거나, 그 때 운동장을 가득 메운 주민들보고 불 끄라고 명령만 내렸더라도 여수 중심가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1028일 오후 3시경 시민들은 풀려났다. 그러나 대부분의 집은 불타버리고, 그때부터 가담자의 색출과 처벌이라는 무서운 토벌작전이 다시 시작되었다. 수도경찰(朱鍾日경감)과 전남도경 특수대, 여수경찰 특수대가 종산국민학교에 본부를 두고, 40대 미만의 남자들은 가담혐의가 있는 것으로 보고 운동장에 팬티만 입은 알몸으로 앉혀놓고, 근 달포동안 한 사람씩 조사실로 불러 장작개비를 휘두르며 자백을 강요했다. 견디다 못한 피의자들이 비명을 지르다 까무러치면 바케츠로 찬물을 끼얹어 정신을 차리면 또 고문을 해서 억지로라도 자백을 받아냈고, 일부는 경찰에 의해 오동도로 끌려가 사라졌다. 우익인사라고 해도 모두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충무동 1297번지에서 여수고무공장을 경영하던 정태식 사장은 문수동야산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서 가족들은 지하에 숨어있고, 간부들과 마루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진압군이 들어 닥치면서 불문곡직하고 총을 쏘아 7명을 죽여 버렸다. 반란군이 여수를 일주일 동안이나 점령하고 있던 상황을 고려한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지라도 주민과 학생에 대한 조사는 보다 신중하고 면밀해야만 했었다.

반란에 협조했다는 혐의를 씌우는 것은 쉬웠으나, 혐의자로 몰린 사람이 그렇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웠다.

진압군과 경찰의 과도한 색출 앞에서 전 시민은 정도에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가 생명의 위험을 느끼며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진압군의 협력자 색출과정은 12월 중순까지 한 달 반 동안이나 계속 되었고, 이로 인해 여수시내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공포 분위기에 휩싸였다.

14연대가 여수를 장악했던 때에는 인민위원회가 이른바 반동분자로 간주된 경찰관, 우익인사, 우익 청년단체원들을 지목하여 처형했다. 이에 따라 처벌대상에서 벗어나 있는 일반 시민들은 큰 우려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진압군은 전 시민을 혐의자로 의심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처벌받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으로 벌벌 떨어야 했다.

여수의 중심 시가지 일대는 불에 타서 재만 남았고, 며칠 사이에 여수천지는 공포와 죽음의 그림자가 너울대는 도시로 변해버렸다. 저들의 총칼 앞에 마지못해 가담한 수많은 사람들까지 흑백을 가르는 재판도 받지 못하고 순식간에 너무도 억울하게 즉결처분으로 죽어갔지만, 운 좋게 현장에서 사살되지 않은 피의자들은 재판을 받고 사형을 받은 사람도 많지만, 징역을 언도 받은 사람도 많고, 더 많은 사람들이 무죄 석방되기도 하였다.

그해 1113일부터 17일까지 이틀 동안 순천고등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그 때 언도받은 내용이 그들의 죄상이 어떠했는가를 백일하에 폭로해주고 있다.

· 재판에 회부된 인원 : 458,

· 양민으로 판명돼 석방된 자 : 190, 사 형 : 102,

20년 징역 : 75, 5년 징역 : 79, 무죄석방 : 12명이었다.

* 육군사령부는 1949110, 여순사건과 관련하여 군사재판에 회부된 군인의 재판결과를 발표하였다. 2,817명이 재판을 받아 사형 410, 종신형 568, 나머지는 유죄형, 혹은 무죄석방 되었다.

한국전쟁사 1에는 여순사건 1주일 현재 여수지구에서만 관민 1,200명이 학살당하고, ·경상자 1,150, 가옥소실파괴 1,538, 이재민 9,800여명의 피해를 냈으며, 순천지구의 인명피해도 400여명에 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전쟁에 있어서의 노동당 전략’(김점곤 저)에 의하면 여순사건의 피해를 * 여수지구 피해 : 반군에게 학살된 관민 1,200여명,

중상을 입은 관민 1,150, 소실 파괴된 가옥 1,548, 이재민 9,800여명,

* 순천지구 피해 : 사자(死者) 1,134, 행방불명 818, 전파가옥 13

국군이 올린 전과와 손해는

전과(戰果) : 유기시체 392, 포로 1,512, 노획품: M2 소총 952, 38식 소총 679, 99식 소총 863, 박격포 14,

손해(損害) : 전사 장교 9, 사병 42, 부상 118,

합동년감(合同年鑑)에 소재된 사건 관련자에 대한 처벌상황은

111일 사건관련자 89명 사형집행

7일 광주 군사재판에서 반도 28명에 사형언도

3~14일 순천 군사재판에서 반도 102명에 사형언도

6일 고등군사재판에서 반군 35명에 사형언도

여순사건 피해상항은 기록마다 다르다는 것을 참작하기 바랍니다.

해방공간에서 좌익이 뭔지, 우익이 뭔지도 모르면서 우왕좌왕하다가 정부수립 2개월 만에 터진 민족적 비극이다.

13, 14연대 반란군지휘부, 남로당중앙이나 여수좌익과 사전 교감은?

사건 당일, 주간 주번사관 김지회 중위는 저녁 주번사관 박윤민 소위에게 인계하고 시내로 나갔는데, 초저녁에 반란사건이 일어났고 아침에 와서 둘러보고 자기를 후송시키고 시내로 나가서 합류한 것을 보면, 중앙당에서 관리하고 있던 김지회 중위는 14연대의 반란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창수 그룹도 김지회가 남로당원임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사건 당시 여수일보 편집국차장이었던 신양남 씨는 1990년 발행, 여수문화 제5‘14연대 반란편에서 전략- 하룻밤 사이에 세상이 뒤바뀐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도대체가 무슨 영문인지 가닥을 잡을 수 없었다. 어쨌든 숙소로 다시 돌아와 생각하고 있을 판에 뜻밖에 당시 여수지방 좌익계의 거물급이라 할 수 있었던 유목윤씨가 찾아왔다. 그는 나와 동갑이지만 내 외가로 당숙뻘이 되는 사람인데 도대체 어젯밤 사태가 어떤 영문으로 일어난 것이냐?”는 질문이었다. 물론 나 자신이 자다가 물벼락 맞은 격이어서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가 다녀간 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난리가 지방 좌익계와는 아무런 연락이 없이 일어났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후략-

결국 유목윤씨는 아무 곳에서도 정보를 들을 수 없었기에, 지창수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지방 좌익들과 발 빠르게 인민대회를 준비했고 보안서장도 맡아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당시 남로당 중앙 총책이던 박갑동(1919년생, 통곡의 언덕에서)씨가 내려와서, 지창수와 만나 현황보고를 받고 누구누구 중위와 아무개, 아무개 소위는 지금 어디 있냐?”라고 질문하자, 지창수가 장교들은 미제국주의 앞잡이들이기에 19일 밤 거사하기 직전에 보이는 데로 쏴 죽였.”고 하자, 깜짝 놀라며 그들은 육군 내 장교들의 중요한 세포조직 책임자들이다.”라고 하였다. 결국 남로당 중앙과도 사전에 조율이 없었고, 장교와 사병 간에도 서로 당원인지를 모르는 철저한 비밀조직이었다.

6·25 한국전쟁 영웅 백선엽 예비역 대장은 실록 지리산에서 여순반란사건은 결코 남로당 중앙의 지령에 의한 것이 아니다. 제주 4·3과 마찬가지로, 당 말단에서 빚어진 자의적인 행동이었다.”고 밝혔다.

14, 환상의 여학생부대는 있었는가?

한국전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한국전쟁사에는 함병선 소령은 박도경 중위와 함께 신항부두 쪽으로 진격하고 있었는데, 여학생들이 99식 소총을 가지고 저항을 하였다. 함 소령은 짚차로 과감하게 사격하면서 돌진하여 약 100여명의 학생들을 포로하고 무장을 해제시켰다.- 중략 송석하 소령의 제3연대 1개 대대도 종고산 방면에서 행동을 개시하여 시가지 소탕전을 전개하였다. 여학생들이 환영을 가장하여 물을 준다고 유도하여 권총으로 국군을 사살한 예가 몇 건 있었다. 가장 악질적이라고 낙인 받은 것이 여수여자중학교 학생들이었다. 함병선 소령이 여수여자중학교를 1개 소대병력을 지휘하여 수색하였을 때 여수반란의 총지휘자가 여수여중교장 송 욱 으로 알게 되었다. (한국전쟁사 1,470)

동아일보 기자 출신 반충남 씨는 과연 그랬을까?’ 어떤 사건에 접근할 때 어떤 선입관을 가진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지만, 여기에는 너무나 납득하기 어려운 의문점이 많다. 첫째로 함병선 소령은 집중사격을 받고도 장갑차도 아닌 찦차로 돌진하여 1백 명가량의 여학생을 포로로 하고 무장을 해제했다고 한다. 중국 삼국지에 장비의 장판교 무용담 같은 말이다. -중략 함 소령이 1백명의 여학생 포로를 잡았다면 이들은 의당이 처형되었을 것이다. -중략- 진압군에 총질을 하다 체포된 폭도를 여학생이라고 이 놈들, 불장난하지 말고 집에 가서 공부나 해!”라고 타일러서 돌려보냈을 리는 만무하다.

반란사건이 일어 난지 반년쯤 후의 일이다. 당시 여수여중강당에서 여수지방 초·중 교사들의 세미나 같은 것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당시 여수군장학사(요즘 교육지원청장) 오길언 씨가 연구발표 형식으로 여수학생들의 반란가담 문제에 대한 해명이 있었다.

여수반란사건에 상당수의 학생들이 가담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여수여중생들이 한 사람도 가담 안했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여학생으로 직접 총을 들고 나선 사람은 없다고는 단언할 수 있다. 그 증거로 내가 조사한 바로는 여학생으로 현재까지 당국에 처형된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 세간에 알려진 여학생이 오빠하고 나와서 치마 속에서 권총을 꺼내서 쏘았다는 말은, 아마 젊은 군인들이 장난삼아하는 무용담이 과장되어 와전된 것으로 본다.”고 발표하였다.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토끼몰이를 당했던 당시의 상황 속에서 일개 장학사가 확증도 없이 사석도 아닌 공석 상에서 이런 중대한 말을 함부로 할 수 있었겠는가? -중략-

1989년 어떤 교양강좌에 가서 정신이 번쩍 나는 일이 생겼다.

70년대 까지만 해도 여수 진남관에 수용된 부역 여학생들 ­ ­ 이들 10대의 여학생 치마 속에는 권총이 숨겨져 있었다.”고 사진 설명을 하며 게릴라화한 여학생어쩌구 하던 지방신문이 14연대 반란군을 봉기군이라고 표기한 것을 보고 언짢은 생각이 들었다. ‘반란군이나 봉기군이나 거기서 거기라는 말일지 모르나 어쩐지 그 어감이 다르다.

반란군을 봉기군이라 불렀다고 그것이 비위에 거슬린다는 것은 세월이 나를 보수파로 밀어내 버렸구나!’하는 착잡하고 어떤 묘한 서글픔 같은 것을 느꼈다. 어느 날 또 다른 교양강좌의 초청강사인 인기작가가 반란사건을 은유적으로 무슨 의거나 된 것처럼 말하는 것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드는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여섯 살 때 평양시민의 3·1운동을 지도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 세상에, 대한민국 정부에서 펴낸 책의 내용을 토대로 이를 거꾸로 조미료를 첨가해서 여학생부대가 시내 진남관 위의 대판통 고개에 방어진을 치고, 송욱 교장이 총 지휘하는 시민군이 국군과 맞서 영웅적? 항쟁을 하는 드라마가 나오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지금 저 연사가 목청을 돋우고 있는 저 무대 위에서 시민군으로 분장한 여학생이 총을 들고 춤을 덩실덩실 추며 항쟁가를 합창하는 등 북쪽의 단골 메뉴가 되었다는 어느 가극 같은 연극 각본을 쓰는 작가가 안 나온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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