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70주년, 그때를 되돌아본다! (2)
여순사건 70주년, 그때를 되돌아본다! (2)
  • 김충석
  • 승인 2018.12.02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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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선 3•5기 여수시장

5. 14연대 군인반란이 인민위원회로 확대

14연대는 여수를 점령한 뒤 제일 먼저 여수읍사무소(여수시청) 인민위원회를 설치했다. 아침부터 여수시내 도처에는 제주도 출동거부병사위원회 성명서, 여수인민에게 고함, 여수인민위원회 성명서, 인민대회를 알리는 벽보, 미군철수, 토지는 농민에게 라는 벽보와 구호도 나붙었다.

제주도 출동거부 병사위원회 성명서

우리들은 조선인민의 아들이고 노동자 농민의 아들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사명이 국토를 방위하고 인민의 권리와 복리를 위하여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제주도 애국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제주도로 출동시키려는 작전에, 조선의 아들로써 조선동포를 학살할 것을 거부하고, 조선인민의 복리를 위하여 총궐기하였다.

지금 제주도 인민들은 미제국주의의 침략정책에 항거하여 단독선거에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과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고자 4·3인민항쟁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제주도 인민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영웅적으로 투쟁하여서 목숨을 바치고 있다.

이승만 도당은 무수한 애국자를 학살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제14연대의 대대병력을 금 번에 제주도에 증파하여 학살을 조장시키려 하므로, 우리 제14연대는 단호히 출동명령을 거부하고 인민의 군대로서, 인민의 편에 서서 동족상잔에 결사적으로 반대한다.

1, 우리는 조국을 해방시켜준 위대한 소련군은 북조선에서 철퇴하겠다고 성명했다. 따라서 남조선에서 학살을 조장하고 있는 미군도 더 이상 점령할 이유가 없으므로 즉시 철퇴를 거듭 촉구한다.

2, 우리 제14연대 병사위원회가 봉기한 것은 진정한 조선인민의 군대로서 참여하여 우리 손으로 남북으로 갈라진 조국의 통일 독립국가를 건설하고자 저희들은 오늘 분연이 일어섰습니다. 여수인민들은 저희들과 함께 조선인공화국 건설에 다 함께 매진을 합시다. 19481020

6, 여수인민대회와 인민재판

오후 3시경에 백두회관(동문로 6-1,6-2, 당시 중앙동로터리는 없었다)이란 요정이 몇 달 전에 불타버린 빈터에, 임시로 연단과 국기게양대를 만들었다. 여수주민 1,000여 명이 모였고, 이용기, 이창수, 박창래, 주원석, 유목윤, 김상열, 김현수, 강대훈, 박채영, 문성휘, 김귀영 등 여수 좌익계의 이름 있는 거두들이 모두 나왔고, 연장자인 이창수의 사회로 인민대회가 시작되었다.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박수가 터져 나오는 가운데 추도가, 해방의 노래를 시작으로 인민공화국기가 서서히 올라가 펄럭이는 가운데, 남로당 여수위원장 이용기의 개식사에 이어, 유목윤이 지난밤부터 여수에는 인민해방군이 상륙하여 와서 우리를 해방시키고, 순천으로 북상하여 이를 점령하고 북으로 북상 중에 있다. 또한 이북의 인민군대가 38선을 돌파하여 서울을 점령하고 남진 중에 있으며, 남조선의 전체 해방은 목전에 도달하고 있다. 이북의 인민군대가 38선을 돌파하였기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도 오늘 아침에 일본으로 도망쳤다. 따라서 우리 인민은 총궐기하여 남조선을 완전히 해방시키는데 앞장을 서야한다.”고 선동을 했다.

세 번째로 등단한 인물은, 연대 인사계 지창수 상사였다. 그는 군중들의 열띤 환호 속에 손을 흔들며 여유 있는 모습으로 등단해 능란한 말솜씨로 장내를 사로잡았다.

친애하는 여수인민 여러분! 저는 14연대 인민해방군 사령관 지창수입니다. 어젯밤 우리는 미리 북조선 인민군과 짜놓은 계획대로 동족상잔의 제주 파병을 거부하고, 우리 인민의 적인 경찰을 쳐부수고 여수인민을 해방시켰습니다. 또 우리는 북조선인민군과 약속대로 합류하기 위해, 오늘 아침 김지회 동무가 2개 대대병력을 이끌고 이미 순천으로 떠났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 순간 국내에 있는 국방군 동무들도 우리와 호응하기 위해 일제히 일어났습니다. 이승만도 이 기미를 알아차리고 이미 일본으로 도망가고 없습니다. 여수인민 여러분! 이제 앞으로 우리 인민해방군은 통일의 첫 걸음이 되는 군사작전에만 힘쓰고, 후방의 혁명과업은 인민위원회와 보안서가 맡아서 잘 처리해 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혁명과업을 잘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승만 일당의 주구 노릇을 하던 경찰과 친일파, 모리간상배 등 반동분자들을 철저히 뿌리 뽑아야 합니다. 그래야 땅을 파는 농부가 땅임자가 되는 진정한 해방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존경하는 여수인민 여러분! 앞으로 이 여수 땅은 우리 14연대 인민해방군이 조국통일의 첫 북을 올린 영광스런 땅으로서 영원히 역사에 빛날 것입니다.”

지창수의 연설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계속되었다. 이어서 박기암이 여수인민을 대표해서 14연대 인민해방군에게 드리는 메시지를 채택했다. 이어 인민위원회 의장단 선출에는 이용기, 송욱, 유목윤, 박채영, 문성휘, 김귀영 등 6명이 뽑혔고, 의장에는 이용기, 보안서장에는 유목윤이 선출되었다.

다음으로 전평(全評), 민청(民靑), 여맹(女盟) 대표들의 짤막한 축사가 있었다. 이어서 6 개항의 결의문 채택이 있었는데, 이용기가 1개 항씩을 읽으면 박수로 채택하는 식이었다.

   1. 오늘부터 인민위원회는 여수지구 행정기관을 접수한다.

   2. 우리는 유일하며 통일된 민족적 정부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보위하고 충성할 것을 맹세한다.

3. 우리는 조국을 미 제국주의에 통째로 팔아먹으려하는 이승만 분단 정권의 분쇄를 맹세한다.

4. 무상몰수·무상분배에 의한 민주적인 토지개혁을 실시한다.

5. 미 제국주의를 위해 한국을 식민화하려는 현존하는 비민주적인 법 령을 철폐한다.

6. 모든 친일 민족반역자와 악질 경찰관 등을 철저히 처단한다.

대회는 인민공화국 만세 삼창에 이어 최후의 혈전가를 부르면서 끝났고 시가행진에 들어갔는데 도중에 많은 사람들이 끼어들었다.

당시 읍사무소(1949815일 부터 여수시청)앞과 인민대회를 했던 곳에서는 반란군들이 소총과 탄환, 흰색농구화, 미군용 와이셔츠 등을 쌓아놓고 가담자들에게 나눠 주었다. 반란군이 여수를 점령하자, 어제까지 지하에 숨어있던 남조선노동당 여수군인민위원회를 비롯하여 전평여수지방평의회, 여수농민위원회, 민주애국청년동맹, 여맹, 교원노조, 철도종업원, 협동노조, 학통 등 600여명이 자발적으로 인민의용군을 조직하고, 무기를 들고 경찰과 우익진영 인사 체포에 나서는 바람에 긴장감이 확산되었다.

21일부터 반역자 적발과 숙청을 계속하면서 인민재판을 개최했다. 제일먼저 고인수 경찰서장과 사찰계 직원 10여명이 처형되었다.

23일 오후 5시에는 백두회관 터와 도로에 수 천 명의 군중이 참가한 가운데 대규모 인민재판이 열렸다. 반란군들은 우익 요원 사형, 우익 가담자 징역, 남로당비 체납자 취체, 무죄석방 등으로 구분했지만, 대부분 군중심리에 의해 즉석에서 처형되었다.

이 가운데 김태업 노총여수지구위원장은 사형이 떨어지자, 마지막 소원으로 노래 한곡 부르게 해달라고 청하여 울밑에선 봉선화야 너 모습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 필적에, 아름다운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처연하게 노래가 계속 울려 퍼져나가면서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으며 노래가 다 끝나고 사형이 집행되자, 여기저기서 소리 없이 흐느끼는 소리가 나더라며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오랫동안 회자되었다.

7, 여수군청을 비롯한 전 행정기관을 접수

김계유(향토사학가,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23세로 여수군청에 근무하였는데, 어제의 분위기로 봐 우리 관공리는 별 탈이 없을 것 같아 집에 멍하니 있는데, 21일 오후 2시경 정주양 내무과장의 친필이 틀림없는 회장(回章)을 청부 육삼조 가 가져왔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고 이미 70여명의 직원들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회 장 (回章)

내일 오전 10시 군 인민위원회에 사무인계가 있으니 전 청원은 이 회장을 보는 즉시 등청하여 인계서 작성에 착수하기 바람.

단기 42811021일 내무과장 鄭 柱 陽

이때 장성필 여수군수는 사건 전날 광주에 가고 없었기 때문에, 정주양내무과장이 군수직무를 대리하고 있었다.

(이 때 정주양이 군청 직원을 소집한 것은 군 직원들을 유임시키기로 군인민위원장 이용기와 합의를 보았기 때문이었다고 함)

여수군인민위원회가 된 여수군청에는 무장보초만 두 사람 서 있을 뿐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사무실에도 120여명의 직원 중 70여명 가랑이 나와 있었다. 510선거 당시 직원들 앞으로 선거보이콧 우편을 띄우고, 군청 인공기 게양사건으로 평소 주목을 받아오던 공보계 노용배, 학무계 강대학, 농회 서정태 세 사람이 부지런히 설치고 다니면서, “과장 급 이상은 몰라도 우리 직원들은 아무 염려 없으니 걱정들 말라고 위로해 주었다. 조금 뒤 지시에 따라 줄을 서자, 인민위원회 간부란 사람이 나와 좌익식으로 하는 사무인계 서식을 말해주었고, 이등중사 계급장을 단 군인 한 사람이 어제와 오늘 사이에 14연대가 이룩한 전과를 설명해 주었다.

2210시에 군청회의실에 모였다. 이용기가 막료 두 사람과 군인 두 사람을 데리고 정주양 내무과장과 함께 들어섰다. 이용기가 군직원 동무 여러분! 저는 아직 나이도 적고 또 배운 것도 아주 짧습니다. 동무들 가운데는 저보다 연세도 많으시고 또 학벌도 높은 사람들이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동무 여러분! 이번에 우리 14연대가 이승만 도당들이 시키는대로 만약 제주도롤 갔더라면 어떤 결과가 왔겠습니까? 일제 36년 동안 그들 등살에 못 견뎌 일본이나 만주등지로 유리걸식하고 다니다가 해방이 돼서 내 고향이라고 찾아온 우리 동포들을 그들은 5만명이나 죽였습니다. 그 이유는 단선단정을 반대한다는 것 하나뿐입니다. 이승만 도당이 단선단정으로 조국을 영영 분단시켜놓자, 이북에서도 할 수없이 금년 8월 달에 전기를 끊어버려 우리 남한 내의 공장기계가 안돌아 산업이 파탄됐습니다. 그리고 이승만이 미국의 괴뢰인 단독정부를 세우자, 금년 9월 이북도 할 수 없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운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이번에 우리 14연대 동무들이 조국통일을 부르짖고 일어선 것입니다. - 후 략 - 되도록이면 군직원 동무여러분을 그대로 포섭해서 썼으면 좋겠습니다만 대외적인 체면도 있는 것이니, 여기서 호명하는 간부몇 사람만 제외하고 나머지 동무들은 이 자리에 그대로 남아서 우리와 함께 혁명과업완수에 힘써 주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해직자 명단을 발표하였는데 군수 장성필, 내무과장 정주양, 산업과장 한창석, 후생과장 박학례 와 행정, 학무, 공보, 산림, 농정, 면작, 농사계장 등 11명을 발표하고, 군인이 14연대의 전과(戰果)를 말해주고 직원들은 행정반이란 완장을 차고 근무하였는데, 어느 기관이나 개점휴업상태여서 우왕좌왕하다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와 보니 낮에 국군정찰기가 뿌리고 간 삐라를 아내가 몰래 주워 놨다가 내 놓았다.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이범석 명의로 반란군은 지도자를 사살하고 부대에 백기를 달고 투항하거나,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집단 혹은 개인적으로라도 총기, 탄약, 화약을 파괴하고 귀순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때까지 전국적으로 일어난 사태인줄 로만 알았던 주민들이나 공무원들, 뒤늦게 반란에 가담한 사람들도 14연대만의 반란이고 그동안 거짓말에 속았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8, 반란치하 1주일동안 희생된 군경과 지역유지

진압군이 여수를 완전히 수복할 때까지 1주일 동안에 여수에서만 14연대 장교 23명과 하사관 3, 72명의 경찰관들과 16명의 지역유지가 희생되었다. 여수천일고무공장(서교주차장 자리)을 세운 후에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도 하고 있던 큰 재벌로 미평국민학교도 만들어주고, 임시정부에 자금도 보내고, 일본에는 전투기 1대도 헌납하고, 이승만 박사가 귀국하자 이화장(梨花莊)을 기증한 김영준 사장은 배를 타고 피신했으나 되돌아와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세상이 됐으니 공장은 헌납하지만, 당신들은 고무원료를 외국에서 사올지 모르니 내가 심부름은 해주겠다.”고 했으나, 인민재판에서 겨우 살아나와 하루 종일 경찰서 뒷마당에서 경찰관들의 송장을 치우게 한 뒤에 우익지도자들과 함께 읍사무소 2층에 가두었다.

행기 소리가 나며 진압군들이 들어온다고 밖이 어수선한 틈을 타서 연창희 씨와 박귀환 씨가 문을 넘어 탈출하려다 사살당했다.

김영준, 차활인(5·10선거출마자), 김수곤, 최인태, 김본동, 서종형, 이광선, 김옥동, 김동준, 김창업, 박목균, 강창구 씨 등은 인민재판이나, 현장에서 학살당했다. 대동청년단 여수부단장 장중채 씨는 충무동파출소 앞에서 반도들에 붙잡혀 몰매를 맞고 채이고 실신하자 죽은 줄 알고 가버린 것을, 주민들이 업고 집으로 돌아왔으나 숨지는 등 16명의 우익인사들이 무참히 희생당하였다.

반란군이나 좌익들에 의해 학살당한 주검들
반란군이나 좌익들에 의해 학살당한 주검들

 

희생된 경찰관 72명의 충혼비전‧후면/진압군에 희생된 분들의 원혼비‧형제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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