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병(老兵)의 넋두리
노병(老兵)의 넋두리
  • 김충석
  • 승인 2016.05.16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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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 여수시 민선 3기, 5기 전 시장]

수필              김 충 석 /  노병(老兵)의 넋두리

 

김충석 민선 3기,5기 여수시장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선도 안보고 혼례를 치렀고, 속 썩인 일 없이 무탈하게 잘 자라서, 좋은 배필들을 만난 3남1여가 얻은 귀한 손주들이 아직은 여섯, 손자 둘이 함께 중학생이 되어, 열여섯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오순도순 저녁을 함께 하는데, 올해가 희수(喜壽)에 결혼 50주년이라 만감이 교차하며, 지나온 세월이 주마등처럼 흘러갑니다.

청명한 날은 한라산이 보이는 멀고도 외딴섬, 여수에서 뱃길로 88km 떨어진 삼산면 초도 의성리에서 태어나, 들로 산으로 갱변으로 뛰어 놀던 철부지 시절, 쇼와 니주낸(昭和20년)이라던 어느 날 오후, 난생 처음 굉음과 함께 붉은 해가 새겨진 비행기를, 하얀 별이 그려진 비행기가 쫒고 쫒기며, 339m의 상산봉을 빙빙 돌면서 사라져간 며칠 후에, ‘순사들은 다 도망가고 일본은 망하고 조선은 해방이 됐다’고 어른들이 좋아서 만세를 불렀고, 우리 꼬맹이들도 덩달아 날뛰었는데, 학병으로 끌려갔던 작은 아버지도 돌아오셔서, 히노마루로 태극기를 만들고 “우리말과 글, 역사를 되찾았다, 금년이 단기4278년”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남농북공 (南農北工)이라 함께 살아야 하는데, 38선으로 허리가 잘렸으니, 큰일 났다고 걱정들을 많이 하셨고, 일본사람들한테 팔았던 김, 미역, 톳 같은 해조류의 판로가 끊어지고, 물가가 천정부지로 올라가서 섬사람들 살기가 무척 힘들었고, 약도 주사도 없는데 호열자(코레라)와 손님(마마·천연두)까지 창궐하여 97세의 증조모와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으나 장례식도 못 치렀습니다.

초도국민학교에 들어갔으나, 책도 없고 공책도 귀하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짚신을 신고 다녔습니다. ‘미국을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고, 일본이 일어나면, 조선아 조심하라’는 말과, ‘단기4283년에는 38선이 24간다.’는 말이 돌았습니다. 3학년 때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두 달 만에 여수 신월리에 주둔하던 14연대 좌익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불똥이 초도까지 튀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5학년 때 6·25사변(한국전쟁)이 터져 예언처럼 38선이 무너지고, 여수와 가까운 섬들까지 다 인민군에 짓밟혔지만, 우리 삼산면은 부산과 제주를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라고, 군함이 바다를 지켜주자, 청년들이 자경단(自警團)을 만들어 요소요소마다 죽창으로 경비를 서서, 인민군은 보지도 못하고 방학 때만 쉬고 학교에 다녔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여객선들은 해군에 징발되어 풍선(風船)을 타고 여수에 나와, 자취하면서 여수서중학교에 다녔는데, 이승만 대통령께서 “3년 이상 싸워 전국토가 초토화됐고, 국내외 군인과 민간인 수백만 명이 희생되었는데, 북진통일(北進統一)을 해야지, 이대로 휴전하면 언젠가 또 전쟁이 터진다.”며 휴전반대 데모를 지시하셔서, 4286년 1학기는 한 달에도 여러 차례, 심지어 시험을 치다가도 비상종만 치면, 책가방을 싸들고 운동장에 모여 십리나 떨어진 여수동국민학교로 달려가, 다른 학교 학생들과 함께 휴전반대행사와 시가행진도 하고, 이대통령의 특명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해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지만, 우리나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휴전이 성립되어 7월27일 포성은 멎고, UN군은 차례로 떠나갔습니다.

전사했다는 장병이 포로교환으로 살아오고, 자유를 찾아 월남한 동포들과 수많은 피난민들과 이산가족, 국민들의 삶은 너무나 고달프고, 힘들고, 서러워도, 요즘처럼 자식이 부모를,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패륜(悖倫)만은 없었습니다.

여수수산고 어로과(漁撈科)에 합격하고, 등록금과 하숙비를 마련하지 못해 5월 중순에야 뒤늦게 입학하였으나, 아버지의 사업이 살인적인 고리채에 눌려, 임금도 못주고 온 가족이 시달리며 고생하느라, 그 뒤로 등록금과 하숙비를 못 내어 여러 달 눈칫밥을 먹고, 학교에서는 시험 칠 때마다 쫓겨나고, 추위에 내복도 없이 견디다 못해, 11월 말 자퇴원(自退願)을 제출하고 고향으로 갔습니다. 인건비를 못주어 선원들이 선창 안에 내팽개쳐버리고 간 어구(漁具)들을, 어머니와 함께 날마다 물이 나면, 낫으로 처리하여 어머니는 이고, 나는 바지게로 날라 정리했고, 밤이면 호롱불을 켜놓고 공부했습니다.

해가 바뀌어 1월18일, 담임선생님이 아버지에게 보낸, 봉투가 헤어져 금방 찢어질 것 같은 편지에 ‘자퇴원을 받고 재능이 아까워 교장선생님께 말씀드려, 개교 40년 만에 처음으로 등록금을 면제해주기로 했으니, 하숙비만 해결할 수 있으면 보내주라’면서, 겨울방학 전에 치를 시험시간표까지 동봉해서 12월초에 보낸 편지가, 한 달 보름이나 지나서 도착했으니, 기가 막혀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신세를 한탄했습니다. 당시 초도는 우체국이 없고 배달부도 없는 유치교부지(留置交付地)였기 때문입니다.

며칠 후에 아버지가 장흥에서 장리 벼 20가마를 구해 오셔서, 뒷날 한가마니를 여객선에 싣고 하숙집에 들려, 밀렸든 하숙비 중에서 우선 두 달 반치로 드렸습니다. 저녁에 김은식 선생님댁에 갔더니 깜짝 놀라셨습니다. “큰 배려를 했는데 소식조차 없어 학교에서는 자퇴처리를 했다.”고 하셨습니다. 다음날 등교하니 모두 반가워했고, 선생님과 교장실에 갔는데 아무 말 못하고 눈물만 쏟아지자, “이야기는 선생님한테 들었다. 열심히 해라” 하시어 복학이 되었습니다.

가정형편상 대학은 갈 수 없고, 해군사관학교에 가려했으나, 호적이 두 살 늦게 되어 원서조차 쓸 수 없어 절망했습니다. 잘나가는 기업가 부인이 “자기 딸과 결혼하면 대학을 보내주겠다”했지만 사양하고, 직장을 얻어 야간대학이라도 다녀야지 하고 상경하여, 명성 높은 대학 교수님들이 강사로 나오고, 성적이 우수하고 교직과목을 이수하면, 문교부장관이 중학교 2급 정교사 자격증을 주고, 유일하게 2년제인데, 등록금이 타 대학의 절반인 516,000환, 야간부는 468,000환이라, 등록금만 해결할 수 있다면 경기대학 상과 야간부에 다니는 것이, 내게는 기회이고 서광(曙光)이었습니다. 경대학보사에 취직하여 기자로 일하면서 틈 이 나면, 낮에도 강의를 듣고 밤에는 4시간 수업을, 교수님들의 원고를 받으러 명문대학으로 가서, 원하는 강의도 들으면서 실력을 쌓아갔습니다.

중학교입시지도를 위해 겨울방학동안 마산에 있다가, 4293년3월15일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마산시민들의 3·15 의거를 보았고, 4월19일에는 학도호국단장이 주저하여, 학보사기자들을 앞세워 경기대 주간부 학생들과 함께 학생혁명대열에 나섰습니다. 제2공화국 장 면 내각이 들어선 뒤에, 세 번이나 경기대학 대표로초청을 받아 총리와 장관들을 만났고, ‘정원미달 실업고교를 4월 신학기부터 인문학교로 전환시킨다.’는 정부계획을 거꾸로 육성책으로 바꾸게 했습니다.

4294년5월16일에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구악을 없앤다하고 고리채도 없애고, 단기를 서기로, 한글전용을 하고, 우리 시간과 섬머타임도 폐지하여 일본과 같이 쓰게 하였고, 1962년6월10일에는 10환(圜)을 1원(圓)으로 화폐개혁을 발표하였다. ‘부산영도에 있는 대한조선공사에서 3,000톤 화물선을 진수했다! 우리나라에 경사 났다!’고 뉴스에 나올 때, 서대문형무소 뒤 현저동에서 자취를 하며, 동국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우리나라의 화물선은 39척에 총톤수 93,000톤뿐이었는데, ‘외화 획득원으로서 한국해운에 관한 일반적 고찰’이란 논문을 제출하였더니, 최우수논문으로 선정되어 상학논총(商學論叢)에 실렸고, 청와대 안광석 교통체신비서관의 연락을 받고 들어가 설명하였더니,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반영되어, 우리나라가 해운(海運), 조선강국(造船强國)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군복무를 마치고 수산업에 뛰어들어, 고교시절의 한(恨)을 생각해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작은 초도우체국을 세웠고, 열심히 일 하다가 여러 차례 죽을 고비도 넘기면서, 한 때는 21척의 선박에 육상축양장까지 경영하여, 여수에서 세금을 많이 내는 기업가 축에 들기도 하였습니다.

1976년부터 서울시가 베어 없애기로 한, 남산위의 소나무를 살려 보존하게 했고, ‘전국아동목욕요금 인하운동’을 벌려 80년부터 국민학생들은 50%만 냈으나, 정부에서 후속조치를 안 해주어, 4년으로 끝나버려 몹시 서운하였습니다.

정직, 성실, 근면, ‘비범한 성과는 비범한 노력에 있다’는 신조로, 청년회의소, Rotary, 지역발전협의회, 지역사회연구소, 수산인회, 육성회, 동문회 회장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시정자문위원 등등 언제나, 어디서나, 무슨 일을 맞든지, 창의적 발상과 실천으로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2002년 자천타천으로 공직선거에 처음으로 출마하여, 여수시장에 당선되어, 2010여수세계박람회 유치에 최선을 다해, 부로츠아프, 케레타로, 모스크바까지 이기고 결선에서 상해에 졌지만, 작지만 아름다운 여수를 세계에 알렸고, 실의에 빠진 시민들에게 2012여수세계박람회를 국가계획으로 확정하여 BIE에 제출하고, 제89회 전국체전을 유치하고, 정부계획에도 없든 여수~묘도~광양을 잇는 이순신대교를 국책사업으로 확정하고, 획기적으로 예산을 많이 따오는 등, 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누구도 재선을 의심하지 않았으나, 내가 여러 해 동안 제안하여 ‘공천을 신청하고, 떨어지면 그 선거에는 출마하지 못하도록’ 제도를 바꾸었는데, 당대표와 도지부장의 농간으로 공천을 못 받아 무소속이나 다른 당으로도 출마를 못하여, 하늘이 무너지듯 좌절했던 기막혔던 일, 애써 추진하던 일들이 축소되거나 변형되고 없애는 것에, 눈도 아프고, 귀도 아프고, 가슴도 아팠습니다.

4년이 지나 2010년5월, 민선5기 시장선거가 한 달도 안 남았는데 ‘침몰하는 여수를 구하라! 박람회 시작했든 김 시장이 마무리하라’고 애향심이 강한 시민들은 성화지만, “도지사, 도교육감, 도의원, 교육위원, 시장, 시의원후보 100여명이 한꺼번에 출마하였으니, 선거사무실이 어디에 있으며, 선거운동원이 어디에 있겠는가?”하며 사양하였으나, 결국 떨어지더라도 시대적 사명을 생각해서 수락하였더니, 두 분이 사무실을 무료로 내주시고, 자원봉사자들이 모여 들어, 무소속으로 출마, 기호 9번! 구원투수가 되어 기적적으로 당선되었습니다.

불가능이라며 반납하자던 박람회를,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하고, 호프불루점퍼에 앞뒤에 로고를 새겨 입고 국내외를 누비며, 홍보와 함께 예산확보와 각종 건설공기를 맞추는 시간과의 전쟁을 하면서, 온갖 준비를 다 마치고 ‘2012여수세계박람회’를 93일간 성공 개최하여, 대한민국을 빛내고 여수시가 BIE로부터 금메달을 받으니 모두가 기적이라며 칭송했습니다. 시장이라고 나만 빼고 유공자들과 시청직원들은 정부로부터 훈·포장과 장관 표창을 받았습니다.

민선5기 4년 동안에만 현안을 해결하고, 박람회를 치르고도, 서울에 여수학숙(麗水學宿)을 비롯해서 공공청사 20개를 만들고 510억이나 부채를 갚았고, 지자체 중에서 여수시가 여러 분야에서 상과 상사업비도 최고로 많이 받았으며, 67건에 7조 이상 투자유치를 하고, 투자만족도 조사에서 우수지자체로 선정되었습니다.

천 만 관광객이 몰려오는 ‘세계로 웅비하는 4대 미항 여수’로 우뚝 세웠고, ‘해양관광’이란 말과 함께, 국제적으로는 ‘해상실크로드(Sea Silk Road)’라는 말이 통용(通用)되게 했으니, 외딴섬 초도에서 태어나 나름대로 흔적은 남긴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한글세대고 4.19세대로 각자 산업화화 민주화에 앞장서서, 자랑스러운 조국 대한민국을 세워 왔으나, 세월 따라 하나 둘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 시절엔 이, 벼룩, 빈대, 모기가 밤마다 설쳐대고, 파리와 쥐, 진드기와 송충이와 뱀이 득실거리고, 연탄이 보급되어 산림녹화에는 기여했지만, 아까운 사람들이 너무 많이 희생되었고, 해마다 보릿고개에는 굶어서 죽고, 광산, 연근해어선, 원양어선, 파독광부와 간호사, 월남파병, 중동 진출 등등으로 헐벗고, 어렵고 힘든 세상을 잘 이겨내어, 잿더미에서 한강의 기적을 만들고, 세계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대한민국을 만든 위대한 국민이고, 국운(國運)도 창창(蒼蒼)했습니다.

바라기는 대통령이나 지자체장이 바뀌더라도 좋은 정책은 계승하고, 잘못된 것은 버리되, 부족한 것은 최대한 보완하여 예산낭비를 없애고, 계속 웅비해야 합니다.

사면보권의 오남용이, 3권 분립제도와 우리사회의 정직, 양심, 정의, 신의와 신뢰를 무너뜨렸고, 정치는 갈수록 퇴보하며 법에서 정한 특권 외에, 국민들도 모르는 온갖 특권을 만들어 권력에 취하며, 갑질 논란으로 국민들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잃어버린 정치인들도 제발 국리민복을 위해 거듭나고, 국민들도 정신 똑바로 차려서 정상배들의 감언이설에 더 이상 속거나 놀아나지 말고, 기권하지 말고, 똑바로 투표하여 정치개혁을 서둘러야 우리나라와 민족이 삽니다.

예전 우리가 배울 때처럼 교육현장이 존경받는 선생님들로 넘쳐나고, 교육감 직선제도의 개선과, 일도 안하고 월급 받고 자식들에게 세습하는 귀족노조도 없애고, 노사가 화합하여 노동현장도 개선돼야 우리나라가 발전합니다.

서남해안의 만(灣)과 갯벌이 수산자원의 보고(寶庫)인줄도 모르고, 무분별하게 매립하여, 환경생태계를 파괴하여 수산물 수출국에서 수입국으로 전락했는데, 당초 목적대로 사용하지 않고 남아있는 곳이라도 우선 둑(방조제)을 터서, 환경과 바다를 살려, 미래 후손들의 삶의 질을 회복시켜 주어야 할 것입니다.

남북관계가 갈수록 악화되고, 북은 핵실험과 미사일, 장사포로 겁박해 오는데, 방산비리로 부정부패가 만연한데도, 솜방망이 처벌만 하고 있으니 기가 막힙니다.

이적행위(利敵行爲)로 다스릴 특별법을 만들어 근절하고, 세계 최고최신의 병기를 만들어 조국수호와 평화통일의 보루(堡壘)로 우뚝 세우는 것이 시대적 사명(使命)입니다.

북한은 적화통일의 꿈을 버리고, 국제사회의 뜻을 받아드려, 한반도의 비핵화와 남북한이 교류와 협력을 통해 상생(相生)의 길로 나가야 민족의 미래가 열릴 것입니다. 내 생각이지만 병법(兵法)을 무시하고 두 곳에 세운 요새(要塞)가, 유사시(有事時)에 재앙이 되지 않기만을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잘못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나 집단들은, 공산주의가 사라진 역사를 되돌아보고,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백성들의 설움,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하신 선열들과,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공산침략을 무찌르고 나라를 지킨 학도병들과 전몰용사들!,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자유 대한을 지켜주기 위해, 머나먼 한반도에서 목숨 바쳐 싸웠던 UN군들과, 허리띠를 졸라매고 자식들을 공부시키고 나라를 일으킨 부모님들을 생각해서라도, 위대한 조국건설에 자기는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해 왔는지? 곰곰이 생각해서 비판은 하되, 대안을 제시하고, 법을 잘 지켜나가는 민주시민으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0여년이나 해오던 사업도 정리했고, 한국회의법학회 회장을 비롯하여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망중한(望中恨)이란 자서전을 쓰고 있는데, 아직은 건강하지만 언제 갈지 모르니, 장기 기증서라도 작성해 두어야겠습니다. - 2016. 3. 21 -

 

김 충 석 2007년 현대문예 등단, 국민훈장 동백장, 대통령표창 외 각 급 기관단체로 부터 324회 수상. 저서 ⌜행동하는 지성으로⌟외 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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